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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엔 활자체가 정지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운동성과 가변성을 가진 것으로 확장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타이포그래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타이포그래피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글자를 다루는 모든 일은 전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픽 디자인이 ‘이미지+글자’라는 큰 두 가지 개념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입장인데, 그중 글자 영역을 담당하는 축이 타이포그래피다. 하지만 활자체 디자인의 영역으로 한정 짓는다면 개인적으로는 범위를 더 좁게 보는 편이다. 활자체는 일종의 제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완성된 폰트 파일로 제너레이트되지 않는 몇 글자의 레터링 등은 타이포그래피 영역에 속하는 작업이지 활자체 디자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큐 코리아, 2019
    스튜디오 설립 이후, 혹은 독립적으로 활동한 이후 깨달은 점이 있다면?
    요즘 들어 많이 드는 생각은 “혼자서는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상모까지 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은 한 가지 매체만으로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모든 작업을 완성하는 시대는 지났다. 디자인 분야와 매체 사이의 장벽이 낮아지면서 한 가지 작업을 해도 그 작업 안에서 편집, 일러스트, 영상, 웹, 소셜 등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보여 줘야 한다. 일을 진행하면서 내 능력이 부족하거나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타인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로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고 치자. 아무리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겨 한다 해도,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지금껏 본인의 분야에 고민하고 투자해 온 시간은 글자에 주로 집중하고 고민해 온 내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양이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좋은 디자인과 좋은 협업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
    활자체를 그리는 일은 작업의 호흡이 긴 편이다. 특히 한글 활자체는 글자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 보니 짧게는 6개월, 길게는 몇 년도 걸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활자체에 내가 안 보일 수가 없는 것 같다. 한두 글자는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연기해서 그릴 수 있다. 하지만 2,000여 개의 글자를 그릴 때는 나 자신을 속이며 시작해도, 결국 끝날 때 아주 작은 버릇과 습관 하나하나가 모든 글자에 묻어나게 된다. 그래서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내 생각과 고민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대로 좀 무섭기도 하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좋은 활자체가 탄생할 테니 늘 스스로 되묻게 된다.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작업을 보면 단아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전에 작업이 드라이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스로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꽤 건조한가 보다. 왜 그런지 고민을 하다 보니 색을 다채롭게 쓰지 않는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사실대로 말하면 색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것이다. 색을 고르거나 꾸미는 것에도 워낙 소질이 없다. 그냥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다”라는 마음으로 보통 두 톤 정도의 색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 색이나 형태 등 다른 요소가 많아지는 순간 정말 중요한 글자의 힘이 약해진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말 완성도 있는 활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더 멋있고. 그래서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다. 지금 그리는 글자에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뭐 대단한 디자이너라고 벌써 그걸 멋부림으로 숨기고 싶지 않다. 그냥 날것 그대로 드러내야 사람들이 좋은 건 좋다 하고, 이상한 부분은 이상하다고 말해 줄 것이다. 그게 또 일종의 피드백이 되는 셈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실험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일탈’을 발견한 적이 있나? ‘한글 실험 시리즈’에서 활자체가 처음에는 일반적인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글자는 형태가 변화하면서 결국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 한글 실험 시리즈에서는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었다. ‘꽃’이라는 글자는 형태가 조금씩 변화해 마지막에는 활짝 핀 꽃의 모습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꽃’이라는 글자로서의 기능을 잃는 동시에, 꽃의 형태를 통해 같은 의미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숲’이라는 글자 안에서 나무가 숲이 되어 가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나는 글자 형태가 왜곡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일이 특히 흥미롭다. 더 나아가 문자를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문자를 설계하는 활자체 디자이너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궁금하다. 디자인360°, 2020
    한글 활자체 내 라틴 활자체도 다들 열심히 만들었을 텐데, 굳이 다른 라틴 활자체와 맞추는 것에 의미는 있을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초기 한글 활자체에 들어 있던 라틴 알파벳은 디자인 퀄리티가 썩 좋지 않았다. 많은 디자이너는 위와 같은 이유로 섞어짜기 기능을 권장하고, 또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좋은 섞어짜기 작업을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로 배웠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국 활자체 디자인의 수준이 높아지고, 외국에서 수학한 한국 활자체 디자이너들이 많아지면서, 전체적으로 한글 활자체 안의 라틴 알파벳 디자인 퀄리티가 매우 높아졌다. ‘제대로’ 그린 라틴 알파벳 디자인이 한글 활자체에 포함된 것이다. 이제 섞어짜기의 용도는 단순히 좋은 라틴 알파벳과 한글을 말 그대로 ‘섞는 것’을 넘어, 타이포그래피 자체에 성격과 표정, 개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섞어짜기 방법은 기본 활자체 안의 한글과 좋은 라틴 알파벳 디자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될 테고, 섞어짜기는 좀 더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기본적으로 단순히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어울리게 한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풍부한 타이포그래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느냐”가 지금의 섞어짜기 혹은 합성 활자체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내 활자체로 남기고 싶은 문장이나 단어가 있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내가 만든 활자체들이 세상에 남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활자체들로 어떤 문장을 남길지는 내 활자체를 쓰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다.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스튜디오의 정체성과 콘셉트에 대해 설명해 달라.
    스튜디오라 불릴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소소한 작업을 즐기는 개인 디자이너다. 처음에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고 싶은 작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히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 ‘돈을 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면서 좀 더 나 자신의 흥미에 부합하면서도 즐거운 작업들을 선택적으로 해 나갈 수 있었고, 일에 들이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성격의 디자이너가 아니라서, 이렇게 1인 스튜디오의 형태를 빌려 이런저런 일들을 벌여 놓기라도 하면 조금은 덜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막상 작업을 하다 보니 종종 일거리가 생겨, 지금은 생기는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즐겁게 작업하려 노력 중이다. 학교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면서 글자, 특히 한글이 가진 형태적 특징과 미감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자체의 형태가 매우 건축적이고 기하학적이라는 부분에서 많은 매력을 느낀다. 한글을 대하는 디자이너 중에는 ‘한글’이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로서 갖는 문화적 특수성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국어학자가 아닌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한글이 갖고 있는 순수한 조형적 형태에만 집중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위주로 한 편집 디자인 작업을 주로 하게 됐고, 개인적으로 몇 가지 한글 활자체를 개발하는 중이다. 내 활자체를 가지고 다른 디자이너들과 협업하기도 하고, 제목용으로 쓰이는 레터링 작업도 병행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활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나?
    활자체를 처음 만든 건 2001년 중순에서 2002년 초반이었다. 당시엔 한창 비트맵 웹폰트를 만드는 게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일반인이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활자체를 만들어서 배포하기도 했다. 그때 우연히 활자체 디자인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어서 취미 삼아 웹폰트 한 벌을 만들어 봤다. ‘바른글꼴’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 보면 엄청 부끄럽다. 한마디로 조악하고 허점투성이다. 그땐 활자체 디자인을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그냥 재미있어서 했다. 웹폰트 파일로 변환하는 방법이라든가 이것저것 모르는 것투성이어서 여기저기 전문가분들께 메신저로 노하우를 물어보면서 공부했다.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성취감이 생겼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멀티스크립트 프로젝트를 작업할 때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각 문자 체계의 자연스러운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문자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 각기 다른 태어난 장소를 가지고 있고, 문화적 영향을 받으며 저마다의 개성과 형태를 길러 왔다. 멀티스크립트 활자체 디자이너는 이러한 유기체들을 존중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문자 체계를 함께 디자인할 때는 각 문자의 배경을 깊이 조사하고, 이해하고,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뒤,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한다. 워드스 오브 타입,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