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프로젝트
    타이포그래피 작품으로 전시에도 참여하는 것으로 안다. 전시에서는 어떤 작업을 만날 수 있나?
    전시의 주제나 콘셉트에 어떻게 글자를 적용할지 고민하는 편이다. 가령, ‘타이포잔치 2015’에서 공개했던 작업의 경우, 도시 속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글자들의 이미지를 찾는 데 주력했다. 특히 LED에 밀려 사라져 가고 있는 네온사인 간판에 주목했고, 컴퓨터로 정교하게 그려 낸 글자가 아닌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구부려 만들어 낸 옛 글자의 인상을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디자이너로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는 상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더 멋진 말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목표다. 생계에 치여서 일을 그만두지 않고, 60~70세가 되어도 활자체 디자인을 할 수 있기를 꿈꾼다.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2013년 이상체와 2014년 마노체 리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으며, 두 활자체는 각각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나?
    이상체는 안상수의 대표작 ‘안상수체’를 해체한 다음 일정한 간격으로 재배열하여 만든 활자체로, 전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한국의 근대 소설가이자 시인 이상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각 자음과 모음은 사선으로 나열되는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마노체는 안상수가 1993년 탈네모틀 한글 활자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만들었다. 한글 자소는 일정한 길이와 굵기의 선이 그리드를 나누는 모듈을 만들며, 반복되는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리지널 이상체와 마노체에는 각각 세 가지 굵기만 있었다. 새로운 리디자인 버전에서 나는 두 가지 굵기를 추가해 총 다섯 가지 굵기로 디자인해야 했다. 이상체는 각 자소 사이의 간격을 시각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보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노체의 경우에는 특히 가장 굵은 엑스트라 볼드 굵기를 디자인하는 데 많은 논의가 필요했다. 마노체는 하나의 얇은 선을 모듈로 하여 자소의 형태가 구성되는 콘셉트이므로, 선이 지나치게 굵어지면 안상수의 또 다른 활자체인 ‘미르체’와 비슷한 인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미르체는 하나의 정사각형을 모듈로 한다. 따라서 다양한 굵기에서도 미르체와 차별되는 마노체만의 인상을 확실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또한 라틴 알파벳과 숫자 영역도 모두 새롭게 디자인했다. 마노체의 콘셉트에 어울리는 새로운 라틴 알파벳과 숫자의 형태를 제안하고, 한글과 조화를 이루는 글줄의 기준선을 결정하는 데에도 많은 논의를 거쳤다. 레터폼 아카이브, 2019
    ‘읽힐 때의 무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아이돌 그룹의 무대 콘셉트를 자주 비유로 든다. 멤버마다 체형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른데, 무대에 서면 ‘하나의 팀’이라는 게 분명히 보이지 않나. 활자체도 마찬가지다. 한글에는 한글의 옷을, 라틴 알파벳에는 라틴의 옷을 입히더라도 결국 사용자가 받아들이는 전체적 인상은 하나여야 한다. 그 일관성은 획의 대비, 굵기 변화의 논리, 곡선과 직선의 사용 비율, 조형적 긴장 같은 요소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문자 하나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항상 문장이나 문단 단위로 조판해 놓고 ‘이 활자체가 가진 전체 공기’가 유지되는지를 확인한다. 활자체는 결국 개별 문자가 아닌, 조합될 때의 인상으로 평가되니까.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윤슬체라고 이름 지은 이유가 있나?
    ‘윤슬’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 강이나 바다가 빛을 받을 때 반짝거리는 잔물결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붙여 주고 싶은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라 벌써 붙이면 어떡하느냐, 나중에 정말 대표작을 만들면 그때 쓰라는 의견도 있었는데, 처음으로 의미를 준 활자체에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각오이기도 하고. 지금 안 쓰면 누가 쓸 것 같기도 해서….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지금까지는 조금이라도 더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한 섞어짜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개성적이고 다양한 디자인의 일환으로써 섞어짜기를 시도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요즘 일부러 한글과 디자인이 매우 다른 라틴 활자체를 맞추는 것이 한국 내 유행이라 들었는데, 실제로는 어떤가?
    최근에 많이 보고 있다. 한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스타일의 라틴 알파벳 혹은 한자, 가나 문자를 섞어짜는 경우가 많아졌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다양한 문자 스타일이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매우 즐겁다. 우리가 타인에게 하나의 미적 기준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단순히 ‘비슷해’ 보이는 스타일로 모든 나라의 문자를 조판하는 것이 ‘좋다’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양한 개성을 가진 문자들이 적절히 어울리고, 또 가끔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대립할 수도 있는 타이포그래피가 건강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활자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무의식중에 기피하던 스타일을 과감하게 시도한다거나 혹은 다양한 문자와 활자체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지금 한국 디자인계에서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새로운 활자체를 디자인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점은 무엇인가?
    형태, 비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예전에는 일본의 에도 문자처럼 독특하거나 재미있는 형태에서 얻은 영감으로 활자체를 그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보다는 쓰임새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멀티스크립트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글의 세리프 요소를 잘라 라틴 알파벳의 세리프에 그대로 붙이면 매우 어색할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디자이너들은 세리프의 형태와 획의 두께를 단순히 통일하는 것이 멀티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접근이다. 어울리지도 않는데 모든 사람에게 같은 옷을 입히는 것과 같다. 그보다는 각자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히되, 패턴과 뉘앙스 안에서 공통된 특성을 갖게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멀티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에 대한 이상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다르기’ 때문에 하나처럼 보인다. 워드스 오브 타입, 2024
    디자인 영감은 어디서 얻나?
    흔히 영감을 ‘얻는다’라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다리기만 하면 영원히 안 온다. 필립 로스의 소설에 “영감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우리는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게 작업 태도와 완벽하게 맞는다. 그냥 계속 일로서 작업을 할 뿐이다. 굳이 다른 것을 꼽아본다면 작업 밖의 세계에서 도움을 얻는 것 같다. 동물의 움직임, 식물의 수형, 건축의 비례감, 음악의 리듬처럼 디자인과 직접 연관이 없는 것에서 오히려 조형 감각이 확장될 때가 많다. 주변 작업자, 동료들과 나누는 좋은 대화도 큰 도움이 된다.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실험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일탈’을 발견한 적이 있나? ‘한글 실험 시리즈’에서 활자체가 처음에는 일반적인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글자는 형태가 변화하면서 결국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 한글 실험 시리즈에서는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었다. ‘꽃’이라는 글자는 형태가 조금씩 변화해 마지막에는 활짝 핀 꽃의 모습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꽃’이라는 글자로서의 기능을 잃는 동시에, 꽃의 형태를 통해 같은 의미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숲’이라는 글자 안에서 나무가 숲이 되어 가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나는 글자 형태가 왜곡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일이 특히 흥미롭다. 더 나아가 문자를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문자를 설계하는 활자체 디자이너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궁금하다. 디자인36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