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는 주제로 작업하기 위한 활자체로 윤슬바탕체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윤슬바탕체는 단정한 세리프 형태를 가졌고, 날렵하게 사선으로 뻗는 획이 많기 때문인지 사용자는 윤슬바탕체에서 평범한 본문용 명조체의 맛보다는 손글씨의 개성이 더 느껴진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윤슬바탕체를 디자인하면서 특정한 용도를 설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시 이후 개인의 수필이나 시집 혹은 에세이에 주로 많이 쓰이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로 가을이라는 주제어와 텍스트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재 작업 중인 신작 활자체를 써 볼까도 잠깐 고민했으나 아직 정식 출시 전이라 고사했다.
— 지큐 코리아, 2019
좋아하는 브랜드 로고가 있나? 패션 브랜드와 그 외 브랜드를 하나씩 꼽아 달라. 그 이유는?
DANSE LENTE, tamburins. 이유는 그냥 내가 작업했으니까. 그 외에는 ‘요즘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LOEWE, BOTTEGA VENETA. 나는 그때그때 취향이 계속 바뀌는 팔랑귀라 특별히 고정적으로 좋아하는 곳은 없다.
— 지큐 코리아, 2019
가르치는 내용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다문화라서 서로 배우는 게 정말 많을 것 같다. 수업할 때 어려움이 있다면 알려달라.
주로 저학년 수업의 경우는 활자체 디자인 자체에 낯선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활자체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포함해, 글자의 각 명칭이나 세부 요소들이 전체 타이포그래피에 어떤 인상을 만드는지,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같은 디테일한 고민을 처음부터 함께 해야 했다. 좋은 디자인은 좋은 눈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다양한 활자체를 많이 찾아보고, 써 보고, 형태에 대해 고민할 것을 주문한다. 강의를 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지금의 학생들은 다양한 문자를 섞어 쓰는 것에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한글과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라틴 알파벳조차 어릴 때부터 친숙하게 보고 써 온 문자이기 때문에, 디자인의 소재로 만나더라도 크게 낯설게 느끼지 않았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매우 자기중심적인 편이다. 그래서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는 삶을 추구한다. 주변 동료들은 늘 바빠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 바쁘다기보다는 안 바쁜데 바쁜 것처럼 살고 싶어서 그렇게 보이나 보다. 일이 있을 땐 일찍 일어나지만, 일이 없으면 늦잠도 자고 하루 종일 집에만 박혀 있기도 하고, 커피는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신다. 그냥 누구나 그렇듯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매일 한 시간 정도 게임도 한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다양한 브랜드, 아티스트와 협업했다. 각 브랜드 혹은 아티스트의 특질을 어떤 식으로 포착해 활자체로 시각화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이다. 그 브랜드 혹은 아티스트가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지향점을 알고 나면 그 뒤 여러 가지 디자인적 요소를 접목해 활자체를 시각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오래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고 그에 대한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하다.
— 지큐 코리아, 2019
요즘 활자체의 유행은 무엇인 것 같나? 앞으로는 어떤 활자체가 유행할까? 당신의 타이포그래피는 그 유행과 어떻게 조응하며, 혹은 반발하며 나아가고 있나?
사실 잘 모르겠다. 일부러 유행하는 활자체들을 찾아보지는 않는다. 요즘은 유행의 흐름이 특히 빠르기 때문에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온라인상에서 포장된 하나의 활자체가 유행을 타면 그 시기 웬만한 편집물, 광고 등에 모두 그 활자체가 쓰인다. 그렇게 한 번에 폭발적으로 소비되고 나면 사람들은 지겨워한다. 그러한 현상이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유행을 타는 것은 결국 타이밍이기 때문에 그냥 운이 좋아야 한다고 본다.
— 지큐 코리아, 2019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드문 분야다.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초기에는 활자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두루 작업했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활자체 디자인 의뢰가 많아졌고, 지금은 ‘윤민구 타입 파운드리’를 이끌며 활자체 디자이너로 소개하고 있다. 활자체 디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늘 ‘문자의 얼굴을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활자체·활자·폰트 등 여러 용어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타입페이스, 즉 문자의 ‘표정’과 ‘구조’를 만드는 작업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기보다는 문자의 긴 역사, 맥락, 배경을 이해하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태도를 요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 달라.
‘태도’ 자체가 곧 철학이라고 본다. 창작은 보기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성과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들 생각하는데, 좋은 창작은 좋은 태도로 대상을 대하는 것이다. 글자든, 제품이든, 사진이든 큰 상관없다. 먼저 좋은 눈을 갖고, 좋은 것을 보려고 노력하고, 좋은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좋은 태도로 만들어 내려고 하면 어떤 작업을 하든 좋지 않을 수가 없다. 항상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소외되기 쉬운 부분을 배려하고, 내가 만든 것이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지 섬세하게 고민하는 태도 자체가 좋은 작업이자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먼저 되려고 노력하는데, 이거 쉽지 않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한글 활자체 내 라틴 활자체도 다들 열심히 만들었을 텐데, 굳이 다른 라틴 활자체와 맞추는 것에 의미는 있을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초기 한글 활자체에 들어 있던 라틴 알파벳은 디자인 퀄리티가 썩 좋지 않았다. 많은 디자이너는 위와 같은 이유로 섞어짜기 기능을 권장하고, 또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좋은 섞어짜기 작업을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로 배웠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국 활자체 디자인의 수준이 높아지고, 외국에서 수학한 한국 활자체 디자이너들이 많아지면서, 전체적으로 한글 활자체 안의 라틴 알파벳 디자인 퀄리티가 매우 높아졌다. ‘제대로’ 그린 라틴 알파벳 디자인이 한글 활자체에 포함된 것이다. 이제 섞어짜기의 용도는 단순히 좋은 라틴 알파벳과 한글을 말 그대로 ‘섞는 것’을 넘어, 타이포그래피 자체에 성격과 표정, 개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섞어짜기 방법은 기본 활자체 안의 한글과 좋은 라틴 알파벳 디자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될 테고, 섞어짜기는 좀 더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기본적으로 단순히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어울리게 한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풍부한 타이포그래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느냐”가 지금의 섞어짜기 혹은 합성 활자체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글자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한 벌의 활자체를 만드는 데 시간은 얼마나 소요되나?
한 벌의 한글 활자체는 기본적으로 2,780자로 구성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표준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글자들이 포함된 숫자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쓰지는 않지만, 사용자가 한글을 타이핑했을 때 만들어지는 글자들이 있다. 조어는 가능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그런 글자들까지 고려해서 한글의 모음과 자음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최대 글자 수는 11,172자다. 최소 2,780자부터 최대 11,172자를 그려야 하다 보니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 정도 걸릴 때도 있다. 디자이너에 따라 몇 년 동안 그려서 활자체를 출시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라틴 문자 타이포그래피가 한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느끼나? 그 영향을 줄이거나 다시 균형을 잡는 일은 어떤 모습일 수 있으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전 세대의 활자체 디자이너들은 라틴 알파벳의 영향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 문화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참조점, 즉 ‘한글다움’을 고집했다. 하지만 나는 라틴 알파벳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라틴 알파벳은 한글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타입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에 거대한 영향을 끼쳐 왔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한국 활자체 디자이너들은 라틴 알파벳에서 새로운 영감을 찾고, 실험적인 한글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 나는 이러한 흐름을 즐겁게 바라본다. 이는 라틴 타입 디자인 또한 동아시아 문자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세계는 라틴과 한글로 나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고 있다. 모든 문자는 평등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위계나 영향력이 아니라, 각 문자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그 존중을 디자인 안에 어떻게 반영하느냐다.
— 워드스 오브 타입, 2024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건가?
원래 웹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또래 애들이 그렇듯 수시로 꿈이 바뀌다가 우연히 미대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교 1학년 때 문자 디자인 강의를 듣긴 했지만, 한글과 활자체 디자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건 3학년 때였다. 수업 때 과제를 라틴 알파벳 활자체를 이용해 해 갔는데 교수님께서 왜 영어로 디자인했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 했다. 돌아보면 스스로 왜 영어로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내린 선택에 대한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 창피하기도 했고. 그 이후로는 정말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무조건 한국어와 한글로 과제를 해 갔다. 하다 보니까 한국어, 그리고 한글로 디자인하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한국인임에도 왜 디자인에 한글을 쓰는 게 어려운지, 왜 좋은 한글 활자체가 부족한지에 대한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누구나 그렇듯, 공부해야만 보이는 한글의 좋은 점, 다른 문자에는 없는 점 등이 조금씩 보이게 되고, 이후 한글 활자체 디자인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된 것 같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건강이다.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활자체 작업을 할 때 워낙 움직이지 않다 보니 신체 무료 구독 기간이 끝난 기분이다.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그래서 운동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시기가 됐다. 모두 운동하고 건강 찾길 바란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타이포그래피를 배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가장 어려웠던 것은 각 문자 체계가 가진 고유한 배경을 이해하고, 높은 완성도의 활자체를 만들 수 있는 좋은 눈을 기르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라틴 알파벳에서 어센더와 디센더는 일관되고 아름다운 활자체를 시각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반면 한글에는 같은 방식의 기준선이 없기 때문에, 엠 박스라는 디자인 공간 안에서 시각적 중심을 찾아내고 그것을 활자체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각 디자이너는 이를 다루기 위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고, 나 역시 나만의 방법론을 찾고 그것을 아름답게 다듬는 기술을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워드스 오브 타입, 2024
홈페이지에 공룡이 있는 게 특이했다. 공룡을 좋아하나?
주변에선 “콘셉트질” 하지 말라 하던데….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콘셉트이건 뭐건 간에, 일종의 일탈 같은 건데, 어렸을 때부터 공룡을 엄청 좋아했다. 학명을 열심히 외우면서 피규어랑 포스터도 모으고. 만든 활자체에 별도로 만들어 넣어 둔 공룡 모양의 기호활자가 들어 있기도 하다. 디자인 작업을 하다가 지루함을 느끼던 중에 우연히 책장에 꽂혀 있던 공룡 책을 펼쳐 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왜 본인의 전공이랑은 별개로 한두 개 정도는 더 공부하고 싶은 학문이 있지 않나. 주변 친구들이 자연사 박물관 소속 디자이너로 취직해서 공룡 소개하는 리플릿 같은 것들 실컷 만들라고…. 사실 솔직히 그렇게 되면 정말 즐거울 것 같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활자체 디자이너로서 재미난 직업병이 있나?
글자가 쓰인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 단어나 문장의 의미보다 형태적인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직업병이다. 아마 모든 활자체 디자이너가 다 같을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그냥 별생각 없이 읽고 지나치던 TV의 자막이나 거리의 간판들도 이제는 기역이 어떻게 생겼네, 받침은 어떤 위치에 있네 등 글자의 디자인과 모양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제 평생 고칠 수 없는 병이 되었다. 아마 이 인터뷰를 읽고 나서 비슷한 증상을 겪는 분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 컨셉진 65호, 2019
스튜디오의 재정적인 문제는 어떤가?
아직 진지하게 스튜디오의 형태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 고민해 본 적은 없다. 남들과 다르게 내가 철이 덜 들었나 보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1인 스튜디오의 경우 대개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지만,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일반 기업이나 회사에 비해 비교적 덜 안정적일지라도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나 또한 다른 많은 디자이너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삶.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누구나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일 테니, ‘재정’이라는 부분은 결국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할 문제라 생각한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자신만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강점이 무엇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세의 문제인 것 같다. 작업을 대하는 자세. 내가 해서 될 일이라고 판단하면 열심히 하는 것이고, 내 영역이 아니다 싶은 일이라면 건드리지 않는다. 모든 걸 잘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잘할 수 있는 부분, 다시 말해 그동안 해 온 영역에 노력과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편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뭔지, 못하는 게 뭔지 스스로는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일찍 찾았다는 점에선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좋아하는 말이 “되면 한다”이다.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호불호가 확실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책임하다고도 들릴 수 있다. 어차피 상대적인 것이니까.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한글 활자체 디자인에 관해 무엇을 배웠나? 오늘날에도 활자체를 디자인할 때 이어 가고 있는 가르침이 있나?
‘연구소’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는 단순히 활자체를 디자인하고 유통하는 파운드리에 머물지 않는다. 선대 디자이너들이 남긴 귀중한 자료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연구하고 함께 공부하며 활자체를 디자인한다. 활자체를 디자인하기에 앞서, 해당 활자체를 위한 고유한 방법론과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나는 이러한 과정과 더불어 단지 타입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연구자로서 작업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연구소가 소규모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업무를 함께 진행해야 했다. 활자체 디자인과 연구 외에도 그래픽 디자인, 북 디자인, 전시 기획, 굿즈 제작 등 활자체와 연결되는 다양한 일을 동시에 디렉팅할 수 있었던 점 역시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 레터폼 아카이브, 2019
해외에서도 활자체 디자인 공부를 하면서 한글 이외의 글자 디자인에 대해서도 배웠는데, 한글 활자체를 디자인하면서도 빠질 수 없는 게 라틴 알파벳이다. 한글과 너무나 다른 구조를 가진 라틴 알파벳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 또한 그렇게 열심히 만든 라틴 알파벳을 결국 쓰지 않고 합성 활자체로 다른 라틴 활자체와 섞어짜기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한글 활자체의 질이 점점 좋아지면서, 한글 활자체 안에 포함되는 다국어 문자 디자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관심이 높아졌다. 이전의 한글 활자체에 들어 있던 라틴 알파벳의 디자인은 엉성한 부분이 많았기에, 말씀하신 것처럼 조판할 때에는 잘 만들어진 라틴 알파벳 활자체와 한글을 섞어짜기하는 게 기본적인 룰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한국 활자체 디자이너들은 한글 디자인만큼 수준 높은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하는 데 큰 노력을 쏟고 있다. 한글과 조화로운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같다. 어느 정도 명확한 디자인 가이드를 가진 라틴 알파벳 디자인의 콘셉트에 적당히 한글의 구조를 적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조화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디자인은 모두가 예상하는 것 그 이상을 고민하는 학문이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자의 타고난 형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개성과 완성도, 혹은 보는 글자와 읽는 글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꽤 지난한 작업이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활자체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02년 프리랜서 웹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웹폰트에 관심이 생겨 처음으로 활자체 한 벌을 만들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게 됐고, ‘안상수체(1985)’로 잘 알려진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의 연구소에서 활자체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활자체 디자인이 삶을 유지하는 일이 되었다.
— 컨셉진 65호, 2019
새로운 활자체를 디자인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점은 무엇인가?
형태, 비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예전에는 일본의 에도 문자처럼 독특하거나 재미있는 형태에서 얻은 영감으로 활자체를 그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보다는 쓰임새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운영하는 타입 파운드리와 작업 전반에 대해 소개해 달라. 현재 작업에서 중요하게 두는 디자인 철학이나 접근 방식이 있다면 함께 말해 달라.
윤민구 타입 파운드리는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중심으로 다국어 활자체를 설계하는 스튜디오다. 국내외의 다양한 브랜드를 위한 전용 활자체를 개발하고, 각 언어의 사용 환경에 맞는 타이포그래피 방향을 함께 제안하고 있다.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활자체를 그리는 방식과 그에 임하는 태도다. 겉으로 드러나는 스타일은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지만, 활자체가 갖고 있는 기준과 질서—일종의 시스템—는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한다.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도 조형적으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더라도 결국 이 활자체가 ‘왜 이러한 형태’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디자이너의 의도일 수도 있고, 상황에 따른 맥락일 수도 있고, 때로는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서사 혹은 감각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준이 무엇인지보다, 처음 세운 기준이 활자체 디자인이 끝나는 순간까지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기준이 활자체가 실제로 쓰이는 환경에서도 자연스럽게 작동하는지를 계속 확인해야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도 활자가 무리 없이 읽히고 잘 쓰일 수 있게 하는 것까지가 활자체 디자인의 설계 과정이기 때문이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활자체 디자인을 뜻하는 ‘타입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낯선 이들도 많을 듯하다.
영어로 ‘타입페이스 디자인’을 줄여서 ‘타입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제일 익숙한 단어는 활자체나 활자일 것 같다. 폰트, 서체, 글꼴, 글자체 등 다양한 표현으로 쓰인다. 결국 컴퓨터 환경에 설치해서 글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활자체를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브랜드를 위한 커스텀 타입페이스를 디자인할 때, 브랜드의 정체성을 활자체 디자인에 어떻게 반영하나? 특히 멀티스크립트 환경에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하는 점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달라.
브랜드를 위한 커스텀 활자체는 당연하게도 브랜드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브랜드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고, 앞으로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특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은 ‘왜 활자체를 만들려 하는지’이다. 활자체는 브랜드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브랜드가 어떤 톤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지 명확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 활자체는 디자인하는 것보다 디자인된 이후 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활자체의 활용 방향성에 대해서도 클라이언트와 대화를 많이 나눈다. 그렇게 브랜드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지면 디자인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오히려 공을 들여야 하는 부분은 이 디자인이 어떻게 브랜드를 대변하는지 설득하는 과정이다. 활자체 디자인의 방향성과 인상을 이해시키려면 그 디자인의 역사와 맥락, 문화적인 특성이나 트렌드 등 활자체를 고유하게 만드는 기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멀티스크립트 환경에서는 각 나라의 문자가 동일한 목소리로 읽히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동일한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같은 브랜드의 목소리를 내도록 세심하게 조율한다. 또한 전체 다국어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려운 경우, 기존 활자체 중에서 어울리는 조합을 선택하는 ‘섞어짜기’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과연 절대적으로 좋은 활자체, 잘 만든 활자체가 있을 수 있을까?
디자인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모양이 유치하거나 촌스럽다고 해서 무조건 좋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폰트는 ‘글의 목소리’다. 어떤 목소리가 정답이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지 않나. 어떤 목소리이건 그것이 어울리는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디자인으로 하는 판단보다는 제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가’를 쳤는데 ‘나’가 나왔다면 기술적인 결함이니까 확실히 잘못된 작업이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디자이너로서 지금 어느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나?
현재 지점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하는 일을 잘하고 있는 건지, 또 앞으로 계속해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의든 타의든 활자체 디자인이 살면서 선택한 ‘일’이려니 하고 하는 중이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그런 것 같다. 그냥 일이니까 한다.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야지’보다는 그냥 이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싶다. 조금은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삶은 원래부터 우리가 예상한 대로만 살아지지는 않으니까. 한글의 첫 글자 ‘가’에서 시작한 디자인이 마지막 글자 ‘힣’에서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지 모르는 것처럼.
— 컨셉진 65호, 2019
어떤 문자 체계로 타입 디자인 또는 타이포그래피 교육과 경험을 시작했나?
학생 시절, 타이포그래피 작업에 사용할 만한 좋은 한글 활자체가 충분하지 않다고 강하게 느꼈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젊은 문자 중 하나이고, 하나의 활자체를 만들기 위해 그려야 하는 글자 수도 매우 많다. 이러한 이유들을 포함해, 한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활자체 디자이너도 많지 않았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한글 활자체 라이브러리에 더 많은 다양성을 더하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 워드스 오브 타입, 2024
요즘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방금 말한 평범해 ‘보이는’ 일상 같다. 아주 평온한 일상을 보내려면 생각보다 엄청 부지런하고 정신이 건강해야 한다. 가만히 물에 떠 있는 오리가 사실 물밑에서는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달까.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어떤 일상을 보낼지, 어떤 대화를 나눌지, 반려묘와 어떻게 더 건강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낼 수 있을지 등 열심히 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가 최근 가장 자주 고민 중인 아이러니한 주제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타이포그래피의 매력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글자’라는 재료를 다룬다는 점일 것이다. 글자를 그리고 그것으로 어떤 일을 벌이는 게 정말 매력적으로 와 닿는다. 흔해빠진 비유이긴 하지만 좋은 재료에서 나오는 좋은 요리 같은 것이다. 글자 자체가 훌륭한 재료라면 별다른 장식 없이도 훌륭한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다양한 활자체의 결핍에 대한 해소를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느낌의 글자가 없을까? 없다면 만들어 쓰지 뭐” 하는 점도 레터링과 활자체 디자인이 갖는 매력 중 하나이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최근 몇 년간 산세리프체로 리브랜딩한 버버리, 생로랑 로고를 비롯해 셀린, 발렌시아가, 발망 등 많은 브랜드가 미니멀하고 절제된 로고로 리브랜딩했다. 그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많은 브랜드가 산세리프 스타일로 로고를 리뉴얼한 이후, 그 이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개성이 없어지면 좀 어떻고, 미니멀하고 모던하면 좀 어떤가. 그들만의 이유와 논리가 있어서 바꿨겠거니 한다. 단순히 세리프는 전통, 산세리프는 모던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구분은 이제 의미 없는 일이다. 지금 시대에는 다양한 해석과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진 활자체가 넘쳐난다. 나 역시 클라이언트와 내가 지향하는 바가 산세리프 활자체와 잘 어울린다면 주저 없이 산세리프를 권할 것이다.
— 지큐 코리아, 2019
특별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나?
특정 프로젝트에 애착이 있다기보다는 프로젝트마다 배운 것이 달라서 하나하나 모두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어 유튜브와 협업할 때는 장거리 클라이언트와 온라인으로 조율하는 방식의 장단점을 많이 배웠다. 화면으로만 피드백을 주고받다 보면 실제 조판했을 때와 느낌이 다를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디지털 환경에서 조율할 때의 기준’을 따로 갖게 됐다. 반면 을유문화사와의 작업은 매우 일상적인 문자 환경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대중이 가장 자주 접하는 문자가 책의 본문용 활자체인 만큼 구조적으로 편안한 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누가 봐도 눈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 영역이다 보니 오히려 더 섬세한 조정이 필요했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활자체 실험’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나?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실험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나?
활자체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읽기 위한 ‘글자’를 다루는 일이다. 최근에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디스플레이 활자체가 많이 개발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활자체는 여전히 가독성이라는 가치를 최대한 존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활자체 실험’은 이 가독성이라는 가치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일이다. 글자를 읽기 위한 대상뿐만 아니라 보기 위한 대상으로도 바라보며 형태를 실험한다. 글자는 반드시 읽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면 훨씬 더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글자 형태를 탐구할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은 감정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활용한 놀이일 수도 있다. 인간은 호기심과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다양한 실험을 만들고 연구하며 진화해 왔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이러한 실험 정신은 오늘날의 문화와 언어, 문자 체계, 나아가 디자인 분야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글자 형태를 찾기 위해 계속 실험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 디자인360°, 2020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나?
슬럼프를 꼭 극복해야만 할까. 슬럼프가 특별하거나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은 원래부터 하기 싫은 것인데, 하루하루가 슬럼프라고 생각하면 좀 슬프다. 일이든 작업이든 열심히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기 싫을 때도 당연히 많다. 그런데 극복해야만 한다고 억지로 생각하는 순간, 이 또한 새로운 일이 된다. 안 그래도 하기 싫은데 미뤄도 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미루고, 선택지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싫어도 해야 한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브랜드의 지향점과 활자체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이 충돌할 때는 어떻게 조율하나?
조율의 핵심은 ‘대화’라고 생각한다. 브랜드 정체성은 결국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에게서 나오기 마련이다. 대표나 실무자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어떤 이미지를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에 확신을 갖는지 등은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모호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면 미팅을 선호한다. 메일이나 서류만 오가는 피드백은 활자체를 만들려는 브랜드의 의도나 뉘앙스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브랜드와의 대화가 잘 이뤄져 기획이 탄탄하면 시안을 여러 개 만들 필요도 없다. 방향이 명확히 맞아떨어지니까 한 가지 제안으로도 충분하다. 반대로 자료를 너무 많이 보내오는 브랜드일수록 사실은 자기 취향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디테일에 대한 얘기를 하기보다 ‘활자체의 의도와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대화를 먼저 길게 나눈다. 그런 다음 그 톤이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형태를 조정해 나간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활자체 디자인은 시각예술 중에서도 굉장히 느린 리듬의 작업이다. 긴 시간을 두고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일관성’이라 생각한다. 활자체 작업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4년 이상 이어지는 장기 프로젝트가 많다. 긴 시간 작업을 하다 보면 하루하루 다른 느낌과 기준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다듬고 싶은 부분이 생길 때마다 고쳐버리면 여러 스타일의 활자체가 섞여 있는 것처럼 될 수 있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레터링과 활자체를 만드는 과정은 엄연히 다를 것 같다. 둘의 차이와 함께 활자체를 만드는 과정을 소개해 달라.
많지 않은 수의 단어나 문장 정도를 디자인하는 것을 레터링이라고 정의한다면, 활자체는 최소 한글 2,350자, 많게는 11,172자를 모두 디자인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당연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가끔은 매우 지루한 작업이 되기도 한다. 간판이나 영화의 제목처럼 레터링은 글자의 강렬한 인상과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몇천 자의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 활자체 디자인은 글자들의 어울림과 균형이 중요하다. 활자체란 ‘폰트’의 형식으로 내려받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에 어떤 글자를 쓰더라도 하나의 활자체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 컨셉진 65호, 2019
윤슬체라고 이름 지은 이유가 있나?
‘윤슬’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 강이나 바다가 빛을 받을 때 반짝거리는 잔물결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붙여 주고 싶은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라 벌써 붙이면 어떡하느냐, 나중에 정말 대표작을 만들면 그때 쓰라는 의견도 있었는데, 처음으로 의미를 준 활자체에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각오이기도 하고. 지금 안 쓰면 누가 쓸 것 같기도 해서….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멀티스크립트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글의 세리프 요소를 잘라 라틴 알파벳의 세리프에 그대로 붙이면 매우 어색할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디자이너들은 세리프의 형태와 획의 두께를 단순히 통일하는 것이 멀티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접근이다. 어울리지도 않는데 모든 사람에게 같은 옷을 입히는 것과 같다. 그보다는 각자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히되, 패턴과 뉘앙스 안에서 공통된 특성을 갖게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멀티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에 대한 이상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다르기’ 때문에 하나처럼 보인다.
— 워드스 오브 타입, 2024
스위스 ECAL에서 석사 과정 중 바이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에 대해 연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글과 라틴을 함께 다루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또한 한글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환경에서 이러한 연구를 진행한 경험은 어떠했으며, 그 맥락이 작업 방식이나 관점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함께 다루는 것에는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한글과 라틴 알파벳이 같은 공간과 문장 안에서 병기하는 경우가 많고, 그만큼 두 문자를 동시에 디자인하고 또 다루는 일은 한글 활자체 디자이너로서 필수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 좋은 한글 활자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라틴 알파벳도 그만큼 잘 설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라틴 알파벳이 중심이 되는 환경에서 배우고 싶어 스위스에서 타입 디자인을 공부했다. 바이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에 관한 연구는 두 문자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어긋남을 감지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바이스크립트 활자체 디자인을 봤을 때, 형식적으로는 동일하게 디자인했음에도 문자의 리듬이나 밀도, 무게 중심, 문자를 읽는 사람이 느끼는 전반적인 이미지 등의 요소들이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이 미묘한 불편함은 ‘두 문자 체계를 하나의 기준 안에서 다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글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환경에서의 경험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글이 모국어가 아닌 곳에서 한글을 모국의 문자가 아닌 단순한 형태로 바라볼 수 있었고, 한글을 포함한 다른 문자들도 한층 더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었다. 동시에 두 문자의 관계를 생각하며, 두 문자의 차이를 강제로 해결하고 맞춰야 하는 문제가 아닌 활자체 설계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태도로 이어졌다. 어느 문자에 우위를 두기보다, 각 문자 체계가 가진 장점과 개성을 살리며 동시에 작동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고, 조율하는 것이다. 바이스크립트 활자체 작업은 두 개를 똑같게 하는 일이 아니라, 나란히 놓는 일이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하다.
앞서 작업할 때 건조하다는 말을 한 것처럼, 일단 끝난 작업에 대해서는 의미 없이 되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 매번 활자체를 그릴 때 항상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지난 작업이 불만족스럽거나, 또는 크게 만족스럽거나 하지 않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형태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겠지만, 그건 당시 그렇게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더 나아진 내가 더 나은 활자체를 그리길 바랄 뿐이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활자체를 디자인할 때 거치는 과정과 작업 방식을 설명해 달라.
나는 일반적으로 많은 조사를 통해 해당 문자 체계의 본질과 특징을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조사 과정에서는 역사적 자료와 이미지뿐만 아니라 인터뷰와 에세이 등 여러 관점의 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체 디자인 콘셉트를 관통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나 단서를 찾는다. 이론적인 디자인 논리도 중요하지만, 이론만으로는 좋은 디자인의 답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다. 따라서 조사와 함께 손으로 그리는 스케치와 형태 실험도 병행해야 한다. 이 두 과정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고, 그 결과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활자체로 바꾸는 것이 내 일이다.
— 잇츠나이스댓, 2019
각각의 문자 체계는 어떻게 다르며,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나?
많은 사람이 활자체 디자인을 단순히 모양과 형태만을 다루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자는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 살아 있는 존재와 같다. 예를 들어 한글에도 라틴 알파벳의 세리프와 비슷한 요소가 있다. 한글에서는 이를 ‘부리’라고 부르는데, 동아시아의 필기 도구인 붓과 세로쓰기 전통의 영향으로 라틴 알파벳의 세리프와는 형태와 각도가 다르다. 라틴 알파벳을 일정한 간격으로 기준선 위에 늘어선 도미노에 비유한다면, 한글은 네모난 연못 위에 떠 있는 나뭇잎과 같다. 나뭇잎이 물결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듯,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각 음절의 구조에 따라 위치를 바꾸며 가장 편안하게 읽히는 자리를 찾아간다. 활자체 디자이너는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만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 문자 체계를 함께 디자인할 때는 각 문자가 지닌 서로 다른 역사와 생활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 잇츠나이스댓, 2019
한글은 조합 문자라 알파벳 활자체를 만들 때보다 수고로움이 더 따를 것 같다. 한글 활자체를 만드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나?
A부터 Z까지 대소문자를 합쳐도 총 52개인 라틴 알파벳에 비해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글자 수가 매우 많다. 하나의 한글 활자체를 만드는 데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게 어려운 점 중 하나이다. 또한 오랜 역사를 가진 라틴 알파벳의 경우 그동안 연구된 디자인 방법론이 많지만, 역사가 짧은 한글은 아직 명확한 디자인론이 적다는 점도 넘어야 할 산이다. 하지만 그건 뒤집어 말하면 앞으로 한글 디자인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컨셉진 65호, 2019
요즘 어떻게 지냈나?
3년 전, 안상수 선생님께서 소장으로 계신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안그라픽스에 입사한 뒤 계속 같은 곳에서 활자체 디자이너 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연구소의 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활자체 디자인 공부와 작업도 지지하고 격려해 주시기 때문에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최적의 직장이다. 연구소라는 곳의 특성상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항상 충분히 공부하고 배우는 것이 기본이고, 또 같이 있는 분들이 다 연구원들이다 보니 함께 일하며 아직도 스스로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회사 밖에서는 성북동에 자리한 예술 공간인 ‘17717’에 몇몇 분들과 함께 기획 멤버로도 참여하고 있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최근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
쓰임에 대한 부분이다. 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지닌 작품 같은 활자체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사용할 때 의미가 부여되는 활자체가 좋아졌다. 좋은 작품이 아닌, ‘좋은 제품’으로 존재할 수 있는 활자체를 더 많이 만들고 싶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이 활자체를 만들 때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 어떤 글자를 만들고 싶었나?
처음 윤슬체는 매우 굵은 제목용 활자체였기 때문에, 본문용 텍스트에 사용할 수 있도록 굵기를 가늘게 조정하면서도 활자체 가족으로서의 특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었다. 윤슬바탕체 자체로서는 기존의 본문용 명조체보다 더 개성 있는 글자 표정을 가지면서, 동시에 작은 크기에서도 편하게 읽히는 활자체를 디자인하고자 했다.
— 지큐 코리아, 2019
활자체 디자인 분야는 대중에겐 다소 낯선 분야인데, 어떻게 이 분야에 몸담게 됐나?
첫 활자체 작업은 중학생 때였다. 블로그나 미니홈피가 활발하지 않던 때라 웹 디자인을 독학하며 직접 홈페이지를 만드는 게 소소한 취미였다. 그러다 우연히 웹폰트라는 것을 접했다. 사용자가 폰트를 설치하지 않아도 화면에 그대로 구현된다는 점이 그 당시엔 정말 혁신적이었다. ‘내가 직접 폰트를 만들 수 있다’는 데 흥미를 느껴 도트를 하나하나 찍어가며 웹폰트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활자체 디자인 수업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이건 완전히 하나의 전문 영역이구나.”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 같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다른 문자와는 구별되는 한글 활자체만의 특징과 아름다움이 궁금하다.
창제 초기 훈민정음을 보면 한글은 매우 기하학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모든 도형의 기본이 되는 가로선, 세로선, 대각선, 원 등이다. 우리는 태어난 뒤부터 이미 한글의 모양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 조형미를 느끼기 어렵지만, 한국어가 낯선 외국인들에게 한글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조형적으로 매력적인 하나의 그래픽으로 느껴진다. 하나의 ‘그래픽’이라는 것은 곧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쓰고 배우기에 매우 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르는 외국어의 알파벳을 쓰는 것은 어렵지만, 사람 모양의 화장실 심볼은 누구나 따라 그리기 쉽다는 것과 같다.
— 컨셉진 65호, 2019
스튜디오 설립 이후, 혹은 독립적으로 활동한 이후 깨달은 점이 있다면?
요즘 들어 많이 드는 생각은 “혼자서는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상모까지 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은 한 가지 매체만으로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모든 작업을 완성하는 시대는 지났다. 디자인 분야와 매체 사이의 장벽이 낮아지면서 한 가지 작업을 해도 그 작업 안에서 편집, 일러스트, 영상, 웹, 소셜 등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보여 줘야 한다. 일을 진행하면서 내 능력이 부족하거나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타인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로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고 치자. 아무리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겨 한다 해도,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지금껏 본인의 분야에 고민하고 투자해 온 시간은 글자에 주로 집중하고 고민해 온 내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양이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좋은 디자인과 좋은 협업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작업 공간을 소개해 달라.
서울 서교동의 작은 공간을 작업실로 쓰고 있다. 활자체 디자인이란 분야가 재고를 쌓아 두거나 아주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서 일에 적당히 집중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담은 액자, 자주 읽는 책을 올려 두는 선반과 테이블이 있고, 남향이라 해가 잘 들어서 식물과 함께 낮에 작업하기 좋은 공간이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작업 밖에서 새로움을 찾는 편인가?
활자체를 포함해 모든 디자인의 목적은 더 나은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것이 문자나 제품 혹은 더 나아가 새로운 방식이나 제도이든 디자인은 더 아름답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분야다. 그래서 작업 안에만 머물기보다는 작업 바깥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것, 좋은 것을 찾아보려고 한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요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 화두가 되는 이슈나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다국어, 문화, 기술 등 여러 가지 관련 이슈가 있겠으나, 나는 기성문화에 대한 반발을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에서 한글 활자체 디자인은 매우 보수적인 영역이었다. 애초에 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그 몇 안 되는 디자이너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길을 도제식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요즘은 디자인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판에 대한 젊은 반발이 있지 않나. 더 넓은 나라에서 더 다양한 경험을 접하고, 젊은 자신감을 기반으로 좋은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많아졌다. 타이포그래피와 활자체 디자인도 똑같다. 젊고, 실험적이고, 새롭게 변하는 환경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활자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지큐 코리아, 2019
‘읽힐 때의 무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아이돌 그룹의 무대 콘셉트를 자주 비유로 든다. 멤버마다 체형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른데, 무대에 서면 ‘하나의 팀’이라는 게 분명히 보이지 않나. 활자체도 마찬가지다. 한글에는 한글의 옷을, 라틴 알파벳에는 라틴의 옷을 입히더라도 결국 사용자가 받아들이는 전체적 인상은 하나여야 한다. 그 일관성은 획의 대비, 굵기 변화의 논리, 곡선과 직선의 사용 비율, 조형적 긴장 같은 요소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문자 하나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항상 문장이나 문단 단위로 조판해 놓고 ‘이 활자체가 가진 전체 공기’가 유지되는지를 확인한다. 활자체는 결국 개별 문자가 아닌, 조합될 때의 인상으로 평가되니까.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한글을 실험하기 위해 어떻게 분해했나? ‘크로탈라리아’는 한글과 숫자, 라틴 알파벳처럼 동시에 보이는데, 그 과정을 설명해 달라.
‘크로탈라리아’는 벌새의 모습을 닮은 꽃을 피우는 식물 크로탈라리아에서 영감을 받은 실험적 타입 디자인 프로젝트다. 시각적으로는 한글이 라틴 알파벳이나 숫자의 형태를 흉내 내며, 글자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려면 어떤 형태를 지녀야 하는지 질문한다. 개념적으로는 활자체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론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크’는 한글 자음 ‘ㅋ’과 라틴 알파벳 ‘a’ 사이의 관계를 연결한다. ‘로’는 글자의 너비가 좁아질 때 획을 단순화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한글 자음 ‘ㄹ’과 라틴 알파벳 ‘z’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이처럼 언어적 기능이 없어도 형태 자체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글자는 형태와 기능이 상호작용할 때 또 다른 의미를 얻게 된다. 이러한 형태들은 한글이나 라틴 알파벳, 숫자를 흉내 내며 서로 모여 의미 있는 글자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글자는 식물의 줄기와 잎이 주어진 공간 안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너비에 맞추어 각 부분을 유기적으로 변화시키며 주변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한다.
— 디자인360°, 2020
당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스튜디오의 미래는 무엇인가?
어떤 만화책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만화책 작가는 본인이 죽어도 만화 속 캐릭터들이 대신 살아가 주니 행복한 직업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그리고 얼마 전 글자를 만드시는 류양희 선생님께서도 “글자는 마치 살아 있는 자식 같아서 어느 순간이 오면 혼자서도 잘 살아 나간다”는 비슷한 말씀을 해 주셨다. 결국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한 것 같다. 내가 만들었거나 혹은 앞으로 만들 것들도 잘 살아 나갔으면 좋겠다. 물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좋은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겠지만, 나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시적 공간인 ‘스튜디오’보다 일단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오랜 수명을 가질 수 있도록 완성도 있고 즐거운 작업들을 하고 싶다. 외국의 많은 활자체들은 몇십 년, 몇백 년 동안 다듬어지고 사람들의 입과 손에 오르내린다. 내가 없어도 사람들이 계속 내가 만든 것을 찾아 주고 써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싶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작업 하나를 꼽는다면? 그 이유는?
2017년에 송민호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한 ‘In Limbo: 식물의 방’ 전시와 동명의 활자체. 그전까지는 주로 읽기 위한 활자체를 만들어 왔다면, Limbo는 철저하게 ‘보이는 형태’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동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활자체 디자인 규칙과 규범을 벗어나 식물이라는 유기체에서 얻는 자연스러운 비정형적 형태를 바탕으로 규격화된 활자체를 그리는 방법을 실험했다. 유학 직전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어 준 작업이다.
— 지큐 코리아, 2019
작업이 한글과 라틴 문자를 넘어 CJK 문자까지 확장되어 있는데, 구조가 서로 다른 문자 체계들에 일관된 스타일을 적용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나? 각 문자의 고유한 특성을 평면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전체적인 통일감을 만들어내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함께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각 문자의 태생을 존중하는 태도다. 여기서 말하는 존중은 형태를 억지로 통일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어떤 문자를 디자인하더라도 그 문자의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 등을 먼저 이해함으로써 왜 이 문자가 이러한 스타일로 발전되었는지부터 알아가는 것이다. 한글, 라틴 알파벳, 그 외 세계의 모든 문자는 구조와 역사, 쓰임, 살아온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의 규칙으로 맞추는 방식은 오히려 문자를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대신 각각의 문자가 가진 고유한 개성과 구조를 먼저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자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읽어 나가는 식으로 설계한다. 예전에는 단순히 라틴의 세리프를 한글에 갖다 붙이는 식의 일방적인 작업도 많이 봤는데, 그렇게 특정 요소를 일차원적으로 대응시키기보다, 각 문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공간감, 분위기 같은 추상적인 요소들을 기준으로 삼는다. 서로 다른 문자로 조판된 문장을 읽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톤으로 느껴지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스타일의 활자체더라도, 그 나라나 사람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결국 같은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몸에 어울리는 옷을 입되, 그 분위기를 공유하는 것에 더 가깝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당신이 디자인해 보고 싶은 브랜드 로고와 그 이유는?
딱히 생각해 본 곳은 없다. 하지만 내가 봐도 너무 별로라 좀 바꿨으면 하는 곳은 많다. 요즘 유난히 패션·코스메틱 브랜드들과 자주 일하고 있는데 낯설고 어렵지만 재미있다. 고정적이고 불변의 특성이 강한 활자체, 로고라는 분야와 대중의 유행과 흐름에 민감한 분야가 만나는 역설적 지점이 흥미롭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 지큐 코리아, 2019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도 한글 타입페이스 디자인을 교육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에게 한글의 구조와 디자인 원리를 어떻게 설명하나? 또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한글을 디자인할 때 인상 깊었던 접근 방식이나 해석이 있다면 공유해 달라.
한글은 비교적 형태적으로 명확하게 설명되는 문자다.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잘 알려져 있고, 기본 디자인과 구조 역시 기하학적인 요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은 점과 선, 사각형, 삼각형, 원 등 기본 도형으로부터 설명이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문화적 배경과 관계없이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도 빠르게 한글의 구조를 이해하는 편이다. 특히 한글은 일반적인 동아시아 문자권의 네모틀 형식과 다르게, 네모틀을 탈피한 ‘탈네모틀’ 스타일 또한 가지고 있다. 각각의 자음과 모음이 동일한 형태로 조합되는 탈네모틀 한글 활자체는 한국어가 낯선 외국인들이 훨씬 쉽고 직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해외의 디자이너들이 한글을 처음 디자인할 때 흥미롭게도 자신이 속한 문화 배경에 따라 해석 방식이 달라지는데, 각 나라의 문자는 쓰는 도구와 쓰기 방향, 획 공간의 배분, 조판 형식 등이 모두 다르므로, 자연스럽게 자신이 익숙하게 보아 온 문자 환경이 반영된 한글을 디자인하게 된다. 이렇게 디자인된 한글은 때로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안에서 기존 한글 활자체 디자인에서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달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처음으로 떠오르는 대상을 이야기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오타쿠를 좋아한다. 나 또한 어떤 것의 오타쿠이기도 하고. ‘덕질’은 다르게 말하면 ‘디깅(Digging)’이다. 또는 ‘몰입(沒入)’이라고도 한다. 가장 나다운 좋은 것은 결국 미칠 듯이 좋아해서 깊게 파야만 나온다고 생각한다. 꼭 디자인이나 예술일 필요는 없다. 공룡일 수도, 식물일 수도 있다. 그렇게 깊이 파내어 찾고 알아낸 것을 타인에게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이건 이래서 이런 거야. 저건 저래서 저런 거야. 그래서 너무 좋지 않아?”라는 말을 하는 사람과 일하면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하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활자체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활자체는 독특한 매체다. 형태로 보이면서 동시에 ‘의미’가 읽힌다. 시각과 언어가 동시에 작동하는 매체라 어떤 환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표정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만든 활자체가 누군가의 손에서 다른 방식으로 쓰이는 걸 보면 정말 즐겁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쓰여도 그 자체가 좋은 피드백이 된다. 오히려 다음 작업의 힌트가 되기도 하고. 종종 활자체를 ‘쌀’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쌀을 잘 재배하는 사람이고, 그 쌀로 밥을 지을지, 죽을 끓일지, 아니면 디저트를 만들지는 사용자의 몫이다. 사용자의 해석과 응용에 따라 문자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이 든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활자체 디자이너들은 평소에 어떤 활자체를 쓰는지 궁금하다. 명조와 고딕 중에 즐겨 쓰는 활자체는?
신선한 질문인데, 사실 나는 명조를 아주 좋아한다. 산세리프보다 세리프가 그릴 때도 더 재미있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안상수가 한국의 타이포그래피와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그의 철학이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나?
안상수의 디자인과 한글 및 세종대왕에 대한 그의 철학은 당시 서양의 디자인을 좇던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자극과 영감이 되었다. 안상수 이후로 우리는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장점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모국어의 익숙함이 때로는 창의적인 디자인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각 나라의 문자는 제삼자에게 새로운 그래픽으로 느껴진다. 한글 또한 서양의 디자이너들에게는 문자가 아닌 그래픽으로 느껴질 것이다. 나는 디자이너로서 한글을 단순한 문자가 아닌 ‘그래픽’으로 대하고 접근하는 태도를 안상수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안상수는 나에게 ‘격’에 대해 강조했다. 늘 우리가 그 자리에 맞는 ‘격’을 생각하고, ‘격’ 있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디자인을 하더라도 격 있는 자세로 진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태도에 관한 조언이다.
— 레터폼 아카이브, 2019
활자체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지향하고 싶은 점이 있으면 알려달라.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활자체 디자이너가 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활자체 디자인으로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 그렇게 활자체 디자인에만 몰두했더니 다른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놓치며 지나온 게 많았다. 활자체 디자인에서도 ‘가’라는 글자만 그리다 보면 다른 ‘힣’이라는 글자와의 어울림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는 것처럼. 결국 더 크고 넓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삶도 그런 것 같다. 지금은 활자체 디자인이 그냥 삶을 대하는 좋은 태도 중 하나이길 바란다. 조금 무책임해 보일 수는 있지만, 좋은 태도로 그렸기 때문에 좋은 글자가 나오기를 바란다. 태도는 사실 어디에든 적용되는 것이다. 디자인이건, 삶이건, 글자건, 인간관계건.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태도로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좋은 활자체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시각적으로 명쾌하고, 아름다우며 제대로 작동하고 문자 기능에 충실한, 사용이 편리한 활자체. 활자체는 결국 문자가 된다. 그 문자를 읽고 쓰는 사람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만들어야 좋은 활자체가 되지 않을까.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과거엔 활자체가 정지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운동성과 가변성을 가진 것으로 확장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타이포그래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타이포그래피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글자를 다루는 모든 일은 전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픽 디자인이 ‘이미지+글자’라는 큰 두 가지 개념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입장인데, 그중 글자 영역을 담당하는 축이 타이포그래피다. 하지만 활자체 디자인의 영역으로 한정 짓는다면 개인적으로는 범위를 더 좁게 보는 편이다. 활자체는 일종의 제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완성된 폰트 파일로 제너레이트되지 않는 몇 글자의 레터링 등은 타이포그래피 영역에 속하는 작업이지 활자체 디자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지큐 코리아, 2019
좋은 타이포그래피를 결정하는 세 가지는?
균형, 욕심의 빠른 포기, 사람들은 내 작업에 그렇게까지 많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 지큐 코리아, 2019
조판 테스트를 할 때는 어떤 문장을 사용하나? 문자라는 건 조형만큼이나 맥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브랜드 전용 활자체를 만들 때는 브랜드가 자주 쓰는 문장을 그대로 가져와 테스트한다. 실전 조판에서 어떤 표정이 나오는지가 중요하니까. 반대로 개인 작업을 할 때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문장을 섞어 사용한다. 특정 문장에 감정이 얹히면 판단이 흐려질 수 있으니까. 활자체는 ‘모든 글에 두루 어울려야 하는 제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내용, 어떤 톤의 글이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지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활자체 작업과 그래픽을 같이 하는데 작업할 때는 어떤가?
모든 활자체 디자이너의 고민일 것도 같은데, 활자체 디자인은 마이크로를 넘어 나노까지 들어가는 작업이다. 세리프의 형태를 이루는 점 하나의 미세한 위치까지 고민하는 작업이다. 반면 그래픽은 좀 더 크고 넓게 보는 눈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시야를 어느 정도까지 확장할 것이냐, 이동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랄까. 그래서 최대한 시야를 한곳에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활자체 디자인에만 몰두하며 작게만 보기보다, 큼직큼직한 시야가 필요한 그래픽 작업들도 함께하며 그 활자체의 쓰임새와 성격, 표정을 함께 보고 싶을 뿐이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한글은 타이포그래피를 디자인하기에 좋은 문자인가? 그 이유가 있다면?
반반이다. 나는 한글이 한국인에게는 의미로 먼저 읽히는 문자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형태적인 특성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한글이 흥미로운 형태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문자를 점, 획, 면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조형으로 보고, 이 조형을 잘 다루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다. ‘다룬다’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된다. 크기를 조절하는 것, 그리는 것, 배치하는 것 등. 그 디테일에 따라 좋은 타이포그래피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세계의 모든 문자는 디자인하기에 다 똑같이 어렵고, 때론 쉽다. 한글만이 특별하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지큐 코리아, 2019
최근 우리나라 그래픽 디자인계의 흐름을 평가한다면?
평가할 만한 입장이 아니라 대답하기 어렵다. 주변 디자이너분들을 보면 정말 작업을 잘하는 분들이 많다. 근래에는 SNS와 소통 도구들이 발달하면서 누구나 좋은 디자이너의 좋은 작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디자이너와 학생들의 눈높이와 수준이 평균적으로 높아졌으며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방법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잘하는 디자이너들이 너무나 많고 또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제는 단순히 잘하는 것에 더해 잘하면서도 나만의 색이 있어야 한다는 게 어렵다. 지금 좋은 작업을 하고 있는 디자이너나 그룹들도 각각의 색이 확실하고, 젊은 디자이너들도 이제는 유행을 좇거나 잘하기만 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색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같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최근 작업들을 소개해 달라.
최근 ‘노플라스틱선데이’를 위한 베리어블 전용 활자체를 재미있게 작업했다. 그동안 브랜드의 로고와 활자체는 대부분 정적인 형태를 고수해 왔는데,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는 플라스틱의 물성에서 영감받은 NPS의 베리어블 활자체는 글자가 변화하는 물성으로 보이는 지점을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작업하는 내내 즐거웠다. 송은문화재단이 새롭게 연 문화 공간 ‘송은’을 위한 한글 활자체 또한 가장 즐거워하는 한글-라틴 문자 간의 형태적 번역을 시도할 수 있었기에 의미가 남달랐다. 이러한 다국어 활자체의 형태적 번역 작업은 스위스의 타입 파운드리 ‘디나모 Dinamo’와 꾸준히 협업 중이다. 비슷한 결로, 유튜브를 위한 한글 활자체도 최근 작업을 마쳤다. 더욱 깊이 있는 활자체 디자인 교육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자모 JAMO’라는 이름의 작은 디자인 워크숍을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디자이너로서 본인만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
활자체 디자인은 획을 그리는 일이기 때문에 드로잉에 가깝다. 기획 단계에서 기준과 시스템을 세우고 출발하지만, 작업 과정에서는 디자이너의 취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취향이라는 건 결국 어떤 형태를 ‘좋다’, ‘싫다’로 판가름하며 쌓이는 경험의 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왜 이게 좋은 거지?”, “이건 왜 싫은 거지?”, “내가 한다면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진다. 그런 질문들이 작업의 일관성을 살려주는 기준점이자 디테일이 된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활자체를 보면 필자의 인품과 성격이 보인다고 하는데, 당신의 활자체에 담긴 스타일은 무엇인가? 한 단어나 구절로 표현해 달라.
예전에 한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서 작업이 건조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의미로 건조해 보인다는 것인지 꽤 오래 궁리했다. 나는 활자체라는 작업에서는 그 디자이너의 개성이 가능한 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좋은 활자체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런 것이 굳이 보여야 한다면 그냥 ‘건조함’이었으면 좋겠다. “건조하지만 잘 만든 활자체.”
— 지큐 코리아, 2019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좋은 사람.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디자인 영감은 어디서 얻나?
흔히 영감을 ‘얻는다’라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다리기만 하면 영원히 안 온다. 필립 로스의 소설에 “영감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우리는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게 작업 태도와 완벽하게 맞는다. 그냥 계속 일로서 작업을 할 뿐이다. 굳이 다른 것을 꼽아본다면 작업 밖의 세계에서 도움을 얻는 것 같다. 동물의 움직임, 식물의 수형, 건축의 비례감, 음악의 리듬처럼 디자인과 직접 연관이 없는 것에서 오히려 조형 감각이 확장될 때가 많다. 주변 작업자, 동료들과 나누는 좋은 대화도 큰 도움이 된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활자체를 디자인할 때 가장 좋아하는 점은 무엇인가?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글을 주된 문자 체계로 사용하는 활자체 디자이너이며, 두 문자 또는 여러 문자 체계를 아우르는 활자체 디자인에 특히 관심이 있다. 한글을 잘 그리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활자체를 만들 수 없다. 실제 사용 환경에서는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함께 사용하고, 숫자와 기호, 때로는 한자와 가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문자 체계를 다룰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은 조화다. 하지만 진정한 조화란 모든 것을 비슷한 모습으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조화는 같은 모습의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피부색과 눈동자색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방향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 원리는 다국어 타이포그래피와 다문자 활자체 디자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마이클 잭슨과 그의 음악이 훌륭한 이유는 음악 자체가 아름답게 완성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의 경계를 넘어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 잇츠나이스댓, 2019
2013년 이상체와 2014년 마노체 리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으며, 두 활자체는 각각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나?
이상체는 안상수의 대표작 ‘안상수체’를 해체한 다음 일정한 간격으로 재배열하여 만든 활자체로, 전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한국의 근대 소설가이자 시인 이상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각 자음과 모음은 사선으로 나열되는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마노체는 안상수가 1993년 탈네모틀 한글 활자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만들었다. 한글 자소는 일정한 길이와 굵기의 선이 그리드를 나누는 모듈을 만들며, 반복되는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리지널 이상체와 마노체에는 각각 세 가지 굵기만 있었다. 새로운 리디자인 버전에서 나는 두 가지 굵기를 추가해 총 다섯 가지 굵기로 디자인해야 했다. 이상체는 각 자소 사이의 간격을 시각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보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노체의 경우에는 특히 가장 굵은 엑스트라 볼드 굵기를 디자인하는 데 많은 논의가 필요했다. 마노체는 하나의 얇은 선을 모듈로 하여 자소의 형태가 구성되는 콘셉트이므로, 선이 지나치게 굵어지면 안상수의 또 다른 활자체인 ‘미르체’와 비슷한 인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미르체는 하나의 정사각형을 모듈로 한다. 따라서 다양한 굵기에서도 미르체와 차별되는 마노체만의 인상을 확실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또한 라틴 알파벳과 숫자 영역도 모두 새롭게 디자인했다. 마노체의 콘셉트에 어울리는 새로운 라틴 알파벳과 숫자의 형태를 제안하고, 한글과 조화를 이루는 글줄의 기준선을 결정하는 데에도 많은 논의를 거쳤다.
— 레터폼 아카이브, 2019
했던 작업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건 무엇인가?
최근에 만든 활자체인 윤슬체다. 처음엔 전시용으로 열 글자만 레터링을 했는데, 나중에 활자체로 파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레터링은 단독으로 한 글자 한 글자가 가진 아름다움에 그 가치를 두지만 한 벌의 활자체는 전체 글자의 어울림을 고민해야 한다. 그전엔 멋있는 글자를 그리기 위해 이것저것 다 집어넣었다. 그런데 활자체 작업을 하다 보니까 내 욕심에서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생겼다. ‘선택’에 대한 고민과 활자체로서의 가치를 위해 포기하고 절제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다듬는 작업이라 흥미로웠다. 처음으로 정말 ‘활자체’를 작업했다는 생각을 준 작업이기도 하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함께 디자인하는 바이스크립트 타입으로 석사를 받았다. 그 경험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우리에게는 한글이라는 고유 문자가 있지만 실제 텍스트에서는 라틴 알파벳과 숫자, 문장부호 등을 섞어 쓴다. 그러다 보니 활자체를 디자인할 때도 두 문자 체계를 함께 다루는 바이스크립트 작업이 필수다. 자연스럽게 라틴 알파벳 디자인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위스로 유학을 갔다. 초기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하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 그런데 지도 교수님께서 “네가 그린 알파벳이 조금 어색해도 괜찮다. 모국어가 아니기에 오히려 새로운 발상과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씀해 주신 게 큰 용기가 되었다. 일종의 ‘해방감’이랄까. 그때 명확히 깨달았다.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똑같은 디테일이나 형식으로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 중요한 건 ‘두 스크립트가 함께 사용될 때의 조화’라는 것을. 그래서 한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여백이나 획의 리듬, 균형 감각을 자연스럽게 라틴 알파벳에도 가져오곤 한다. 두 언어가 구조적으로 같을 필요는 없지만, 읽힐 때의 무드는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중요하게 여기는 창작자의 태도는 무엇인가?
“디자인은 태도다”라는 말이 있다. 디자인이 단순한 시각적 결과물을 넘어 창작자의 근본적인 철학과 미학, 태도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태도라는 건 결국 무언가를 대하는 나만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일관성’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어디를 고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택의 기점이 생기는데, 그 기준이 되는 게 결국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은 솔직함이다. 명확하고 솔직하게 자신이 묻어나는 디자인을 좋아한다. 활자체 작업을 하다 보면 100자 정도까지는 연기하듯 다른 스타일을 흉내 낼 수도 있다. 처음엔 가진 성향을 조금 감추거나, 기존 스타일을 따라 그릴 수 있다. 그런데 2,000자, 10,000자를 계속 그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본래 습관이 드러난다. 획을 어떻게 꺾는지, 여백을 얼마나 두는지, 굵기를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조절하는지 등이 결국 다 ‘나의 태도’로 돌아온다. 그 지점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결국 ‘연기’가 불가능해지는 때가 오고, 그 끝에서 본래의 나 자신과 만나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늘 상기하는 것, 그게 창작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서로 다른 두 문자 체계를 위한 활자체는 어떻게 디자인하나?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이 있는 주변 환경만을 탐험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콜럼버스가 마주한 아메리카 대륙이나 파이어니어 10호가 탐사한 목성처럼, 우리는 언제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발견하고 싶어 했다. 오늘날 세계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서로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도 더욱 많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문자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발전해 온 문자 체계를 이해하고 그 형태를 디자인하는 일은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활자체 디자이너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도전이다.
— 잇츠나이스댓, 2019
지금까지는 조금이라도 더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한 섞어짜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개성적이고 다양한 디자인의 일환으로써 섞어짜기를 시도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요즘 일부러 한글과 디자인이 매우 다른 라틴 활자체를 맞추는 것이 한국 내 유행이라 들었는데, 실제로는 어떤가?
최근에 많이 보고 있다. 한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스타일의 라틴 알파벳 혹은 한자, 가나 문자를 섞어짜는 경우가 많아졌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다양한 문자 스타일이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매우 즐겁다. 우리가 타인에게 하나의 미적 기준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단순히 ‘비슷해’ 보이는 스타일로 모든 나라의 문자를 조판하는 것이 ‘좋다’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양한 개성을 가진 문자들이 적절히 어울리고, 또 가끔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대립할 수도 있는 타이포그래피가 건강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활자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무의식중에 기피하던 스타일을 과감하게 시도한다거나 혹은 다양한 문자와 활자체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지금 한국 디자인계에서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블랑은 어떤 활자체이며, 어떤 용도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나?
블랑은 가로획과 세로획의 대비가 큰 한글 디스플레이 활자체다. 라틴 알파벳에서 획의 대비가 큰 디돈 계열 활자체는 디스플레이 용도로 널리,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동아시아 타이포그래피에도 이와 비슷한 ‘민초’라는 양식이 있으며, 나는 이 특징적인 획의 형태를 현대적인 한글 활자체인 블랑에 적용했다. 블랑의 공동 작업자인 김지은은 두 번째 디자인 콘셉트로 부드러운 곡선을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를 구현함으로써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활자체를 만들 수 있었다. 먼저 한글 2,575자를 디자인한 뒤 기본 라틴 알파벳과 숫자, 기호를 추가했다. 또한 동아시아의 세로쓰기를 위한 별도의 글리프 세트를 만들고 OpenType 기능을 통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모두에 대응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활자체의 활용도를 크게 높였다.
— 잇츠나이스댓, 2019
스튜디오의 공간에 대해 소개해 달라. 스튜디오의 정체성은 공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특정한 공간을 차리지 않고 주로 집에서 작업한다. 개인적으로는 자유로운 작업실의 형태보다 사무적인 회사 같은 느낌을 더 선호한다. 보통 하루에 글자를 스케치하거나 만드는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글자를 만드는 작업은 특성상 자리에 앉아서 단시간에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정도로 호흡이 길고 끈기를 요하는 집요한 작업이다. 그러다 보니 중간중간 무엇을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작업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하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 또 여느 디자이너들이 그렇듯 작업의 콘셉트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장소나 시간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집과 카페, 도서관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또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많이 보고 공부하면서 그냥 취미처럼 꾸준히 작업하고자 한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멀티스크립트 프로젝트를 작업할 때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각 문자 체계의 자연스러운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문자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 각기 다른 태어난 장소를 가지고 있고, 문화적 영향을 받으며 저마다의 개성과 형태를 길러 왔다. 멀티스크립트 활자체 디자이너는 이러한 유기체들을 존중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문자 체계를 함께 디자인할 때는 각 문자의 배경을 깊이 조사하고, 이해하고,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뒤,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한다.
— 워드스 오브 타입, 2024
작업한 활자체의 이름 뜻은 무엇인가? 혹은 뜻이 없다면 어떻게 짓게 됐나?
윤슬바탕체는 2012년에 그렸던 활자체 ‘윤슬체’의 본문용 굵기 가족으로 계획했기 때문에, 본문용 명조체를 뜻하는 ‘바탕체’라는 단어를 더해 지은 이름이다. 참고로 ‘윤슬’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햇빛이나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지큐 코리아, 2019
작업할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나?
작업할 때 무척 건조하게 바라보는 편이라 무언가 대단한 것을 창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활자체를’이라는 마음이 전부다. 그 필요한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있고. 그냥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활자체를 만들고, 나에게 꼭 필요한 활자체를 만들려고 한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활자체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태도라고 본다. 이건 다른 어떤 디자인 영역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나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 활자체를 보면 만든 사람의 성격과 생각, 태도, 품성이 정말 다 드러난다. 자신의 디자인 철학이 형태로 드러나는 활자체라는 게 사실 대단한 것이다. 그런 활자체를 디자이너로서 하나쯤 갖고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어떠한 활자체를 만들 때 내 느낌이 드러나면 좋겠다. 그게 어떤 느낌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왠지 딱딱하고 드라이한 느낌이려나? 라틴 알파벳 활자체를 봐도 똑같다. “이 디자이너가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살았으니까 이런 활자체를 만들었겠구나”라고 느껴지는 활자체가 있다. 만든 사람이 죽어도 훌륭한 활자체는 계속 남는다. 오래가는, 만든 사람의 삶이 묻어나는, 그리고 거기에 내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한 활자체를 만들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도 계속 공부를 하는 중이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거의 매일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활자체 목록을 스크롤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하나의 활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해 달라.
크게는 ‘기획 → 리서치 → 스케치 → 파생 → 수정 및 검수 → 제너레이트’의 순서다. 처음에는 목적과 스타일, 제작의 이유 등을 고려해서 ‘기획’에 들어가고, 그다음에는 기존 사례나 사용 환경과 용도에 따른 자료를 자세하게 ‘분석(리서치)’한다. ‘스케치’는 한 글자에서 시작해서 단어, 문장, 문단, 500자 이상의 글로 점점 늘려가며 한다. 방향이 잡혔다는 판단이 서면, 추가될 글자를 그리는 ‘파생’을 거쳐 활자체 한 벌이 완성된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라 잘못된 글자가 있는지, 자간은 적합한지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수정과 검수’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면 사용자가 쓸 수 있는 TTF나 OTF 파일로 만드는 ‘제너레이트’를 통해 활자체가 배포된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타이포그래피 작품으로 전시에도 참여하는 것으로 안다. 전시에서는 어떤 작업을 만날 수 있나?
전시의 주제나 콘셉트에 어떻게 글자를 적용할지 고민하는 편이다. 가령, ‘타이포잔치 2015’에서 공개했던 작업의 경우, 도시 속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글자들의 이미지를 찾는 데 주력했다. 특히 LED에 밀려 사라져 가고 있는 네온사인 간판에 주목했고, 컴퓨터로 정교하게 그려 낸 글자가 아닌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구부려 만들어 낸 옛 글자의 인상을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학부 시절 필요한 한글 활자체를 직접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후,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활자체 디자인을 정식으로 배우며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 전반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일을 다양하게 하다가, 지금은 독립 타입 파운드리를 설립해 활자체 디자인에 좀 더 집중하는 중이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최근 한글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타입 디자인 분야에서 한글의 현재 위치를 어떻게 보며, 앞으로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최근 한글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이유라기보다, 한국 문화 전반이 성장하며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확장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해외 브랜드에서도 다국어 커스텀 활자체를 개발할 때 한글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활자체가 단순한 마케팅 요소로 사용되는 것을 넘어, 브랜드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로 기능하는 것이다. 한글 활자체 디자인 분야 역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존 활자체를 단순히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형태를 직접 설계하고, 짧은 단어 혹은 문장은 직접 그리는 그래픽 디자이너도 많아졌다. 앞으로는 양적인 확장보다 완성도에 대한 질적인 고민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시도와 함께, 그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잘 만들어내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업도 눈여겨보는 편인가?
의도적으로 다른 디자인 작업을 찾아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다만, 대학에서 수업을 해 보면 실력이 훌륭한 학생들이 몇 명씩 눈에 띈다. 앞서 말했듯, 활자체 디자인은 무엇보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인데, 강의 시간은 짧고 한정적이다. 스케치를 잘 그리고도 완성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 항상 아쉬웠다. 이런 아쉬움을 해소하고자 약 1년째 원하는 학생들을 모아 주말마다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다들 거의 완성 단계다. 감사하게도 구글에 학생들의 활자체를 판매하기도 했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최근 스튜디오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정체성.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정체성을 찾는 것 또한 활자체를 만드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몇 달,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그냥 앉아서 계속 고민하고 작업해야 한다. 어느 순간의 ‘완성’이라는 것이 없지만, 꾸준히 다듬고 고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본인만의 표정을 띠게 되고, 길게는 몇십 년 넘게 조금씩 보완되어 완성도가 높아지는 활자체처럼 그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공부하고, 고민하고, 작업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정체성 비슷한 것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1인 스튜디오란 곧 자기 자신이고, 그것이 갖는 정체성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생각하는데, 정체성이 없는 1인 스튜디오라면 굳이 운영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디자이너보다 디자인을 더 잘하는 똑똑한 도구들이 개발되는 중에, 동시대의 디자이너들은 어떤 소양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야 하는지.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게 태산이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클라이언트 업무나 개인 작업에서 거치는 일반적인 작업 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그동안 작업 과정에 관해 느낀 점이 있다면?
클라이언트 업무이건 개인 작업이건 어떠한 형태로든 나에게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개인 작업일 경우 타인의 의견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최대한 실험적이거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거나, 공부했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작업들을 해 보려는 편이다. 배운 것을 복습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작업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더 보완하거나 공부해야 하는 부분을 발견하는 데서 보람을 찾는다. 클라이언트 업무에서는 물론 수입이 나에게 남는 가장 큰 것이겠지만, 그냥 그들을 만나 앉아서 작업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작업을 보여 주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그것이 결국 나에게 남는 게 된다. 작업 시간 전체를 통틀어 앉아서 주야장천 이야기를 나누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것 같다. 보통 나와 같은 개인 디자이너와 일하려는 클라이언트들은 거대하고 엄청난 디자인을 바라지 않는다. 그냥 그들이 생각하는 이야기와 생각, 감정 같은 것들이 디자인에 충분히 반영되길 바라는 정도일 뿐이다. 디자이너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치환해 주는 역할에 충실하려면 당연히 클라이언트를 이해하고 고민해야 한다. 보통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대다수가 디자인과는 상관없는 분야의 사람들일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들과 무언가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업무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에게 굉장히 많은 공부와 영양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현재 대학교에서 타입 디자인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다. 대학원에서 모국어가 아닌 글자들을 디자인하는 경험을 했을 텐데, 한국 대학에서 가르칠 때도 한국어 이외의 언어 타입 디자인을 가르친 적이 있나? 수업 안에서 제2, 제3 언어를 디자인하는 기회가 있나?
석사 과정에서 한글과 라틴을 동시에 디자인하는 것을 공부했기 때문에, 수업도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동시에 디자인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특히 중국인 학생의 경우 라틴 알파벳 디자인 과제를 한자로 대체할 수 있게 했고, 일본인 학생의 경우 가나 문자를 함께 작업하도록, 프랑스 학생의 경우에도 프랑스어 문자를 포함하는 라틴 알파벳 한 벌을 함께 디자인하도록 권장했다. 수업 중 필요한 경우, 해당 문자를 다루는 전문 디자이너를 온라인으로 초대해 외부 감수 의견을 받을 수 있는 시간도 별도로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모국어 문자를 디자이너의 눈으로 새롭게 다시 돌아보는 것이 멀티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시작점이 되리라 믿는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디자이너로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는 상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더 멋진 말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목표다. 생계에 치여서 일을 그만두지 않고, 60~70세가 되어도 활자체 디자인을 할 수 있기를 꿈꾼다.
— 현대리바트 힌지 매거진, 2022
직접 활자체도 만들고 많은 활자체를 접할 텐데, 새로운 활자체를 다시금 찾아볼 때도 있나? 혹은 항상 쓰던 걸 자주 쓰게 되나?
실제 편집 디자인 작업을 할 땐 이미 익숙하거나 많이 써 왔던 활자체를 다시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새로운 활자체를 찾아볼 때도 종종 있다. 자주 방문하는 몇몇 파운드리 웹사이트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활자체를 찾아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쏟는 편은 아니다. 자신이 활자체 디자이너이다 보니, 필요하다면 보통 직접 그려서 사용한다. 활자체를 찾을 때도, 이미 다양한 스타일이 포진된 라틴 알파벳 활자체를 먼저 참고하는 편인 것 같다. 웬만한 한글 활자체는 이미 거의 다 알고 있기도 하고, 보통 한글 영역은 직접 그리는 편이라 그런 듯하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만든 활자체 중에 가장 애정하는 활자체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활자체 디자인의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윤슬체’를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윤슬체와 가족 활자체로 디자인한 ‘윤슬바탕체’에 가장 애정이 간다. 활자체 디자인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상용화한 활자체이기도 하고, 또 앞으로 활자체 디자이너로 살면서 만들고 싶은, 또 만들어야 하는 활자체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고민의 중요한 기점을 제공해 준 작업이었다.
— 컨셉진 65호, 2019
현재 한글 활자체 업계에서 부족한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더 다양한 스타일의 한글 활자체가 개발되었으면 한다는 점은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이라 생략하고, 더 나아가 한글 활자체를 문화적으로 더 열린 마음으로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한글’은 아름답고 우수한 한국의 문화유산이라고 교과서처럼 외우고 있는 한국인, 디자이너를 포함해, 많은 것 같다. 당연하지만 한글을 포함한 모든 문자는 평등하고, 다 다른 저마다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한글만이 왜 아름다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다른 문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 어도비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2022
한국 문화에서 한글만큼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적인 정체성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유연함’ 혹은 ‘융통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한국은 외부의 낯선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유행이 빠르고 트렌드에 예민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태도는 디자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변화에 유동적이고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는 점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쉽게 소비되고 사라진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변화에 대한 적극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작업을 더 오래 고민하고 정체성을 차분히 축적해 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져갈 수 있을 때 디자인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더 밀도 있는 문화적 가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한글 활자체 디자인에 관해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글이라는 아주 어린 문자가 열심히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여전히 많은 서양 사람에게 한글은 매우 낯선 문자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문자들 또한 이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서로 다른 문자들을 타입 디자인을 통해 연결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어떻게 그들을 어울리게 하고, 어떻게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그것이 멀티스크립트 타입 디자이너로 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은 역사가 매우 짧은 문자다. 그러한 이유로 아직 한글 활자체의 종류가 많지 않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한글 활자체 디자인이 나아갈 방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의 많은 사람이 한글 활자체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과 실험,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주목해 주기를 바란다.
— 레터폼 아카이브, 2019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
활자체를 그리는 일은 작업의 호흡이 긴 편이다. 특히 한글 활자체는 글자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 보니 짧게는 6개월, 길게는 몇 년도 걸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활자체에 내가 안 보일 수가 없는 것 같다. 한두 글자는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연기해서 그릴 수 있다. 하지만 2,000여 개의 글자를 그릴 때는 나 자신을 속이며 시작해도, 결국 끝날 때 아주 작은 버릇과 습관 하나하나가 모든 글자에 묻어나게 된다. 그래서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내 생각과 고민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대로 좀 무섭기도 하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좋은 활자체가 탄생할 테니 늘 스스로 되묻게 된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실험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일탈’을 발견한 적이 있나? ‘한글 실험 시리즈’에서 활자체가 처음에는 일반적인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글자는 형태가 변화하면서 결국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 한글 실험 시리즈에서는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었다. ‘꽃’이라는 글자는 형태가 조금씩 변화해 마지막에는 활짝 핀 꽃의 모습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꽃’이라는 글자로서의 기능을 잃는 동시에, 꽃의 형태를 통해 같은 의미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숲’이라는 글자 안에서 나무가 숲이 되어 가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나는 글자 형태가 왜곡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일이 특히 흥미롭다. 더 나아가 문자를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문자를 설계하는 활자체 디자이너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궁금하다.
— 디자인360°, 2020
당신이 GQ KOREA의 로고를 디자인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KOREA를 G 밖으로 빼겠다. G와 Q가 애매하게 붙어 있는 것도 눈에 걸린다. Q를 가로지르는 대각선 획의 상·하단이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도 다듬고 싶다. 그 외에도 많지만, 작업 비용이 있다면 더 자세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지큐 코리아, 2019
스튜디오의 정체성과 콘셉트에 대해 설명해 달라.
스튜디오라 불릴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소소한 작업을 즐기는 개인 디자이너다. 처음에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고 싶은 작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히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 ‘돈을 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면서 좀 더 나 자신의 흥미에 부합하면서도 즐거운 작업들을 선택적으로 해 나갈 수 있었고, 일에 들이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성격의 디자이너가 아니라서, 이렇게 1인 스튜디오의 형태를 빌려 이런저런 일들을 벌여 놓기라도 하면 조금은 덜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막상 작업을 하다 보니 종종 일거리가 생겨, 지금은 생기는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즐겁게 작업하려 노력 중이다. 학교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면서 글자, 특히 한글이 가진 형태적 특징과 미감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자체의 형태가 매우 건축적이고 기하학적이라는 부분에서 많은 매력을 느낀다. 한글을 대하는 디자이너 중에는 ‘한글’이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로서 갖는 문화적 특수성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국어학자가 아닌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한글이 갖고 있는 순수한 조형적 형태에만 집중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위주로 한 편집 디자인 작업을 주로 하게 됐고, 개인적으로 몇 가지 한글 활자체를 개발하는 중이다. 내 활자체를 가지고 다른 디자이너들과 협업하기도 하고, 제목용으로 쓰이는 레터링 작업도 병행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 계간 그래픽 #29: 뉴 스튜디오, 2014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나?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 나오는 문장이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다. 애쓴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더라. ‘찰싹’이라는 단어를 어느 만화책에서 봤는데, 그 말도 좋았다. 지금의 상황, 가치관, 생각, 컨디션, 건강, 주변 사람과 나눈 대화, 최근에 본 것 등이 마침 ‘찰싹’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아주 가끔 있다. 그 ‘찰싹’이 오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억지로 영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가끔 운 좋게 영감이 올 때가 있는 것이다.
— 비애티튜드 매거진, 2023
탬버린즈 작업은 ‘향의 질감이 시각적으로 잘 구현된 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떤 접근으로 완성한 결과물인가?
탬버린즈 초기 로고는 세리프 계열이면서 인상이 단단했다. 깔끔하지만 딱딱한 인상이 있었다. 그런데 브랜드가 이야기하는 ‘향’이라는 감각은 훨씬 더 가볍고, 퍼지고, 공기 중에서 흩날리는 이미지였다.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가 핵심이었다. 그래서 획 끝을 아주 미세하게 말아 올리거나, 획 사이의 연결부를 분리해 조각처럼 흩날리는 느낌의 세리프를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공기의 움직임 같은 인상이 생긴다. 또 소문자 조판을 통해 전체적인 무게감을 낮추고자 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향의 결과 더 잘 맞았다. 결과적으로 브랜드가 말하고 싶은 감각과 활자체의 조형을 자연스럽게 잘 맞출 수 있었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강의한 경험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 이 학교만의 특별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는 디자이너 안상수가 한국에 세운 최초의 디자인 대안학교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이포그래피를 디자인 교육의 가장 중요한 뼈대로 삼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내가 가르쳤던 타입 디자인은 매우 중요한 강의 중 하나였다. 활자체를 디자인할 줄 안다는 것은 곧 글자를 이해하고 다룰 수 있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일반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들이 자신의 활자체를 디자인하며 보여 주는 새로운 관점과 접근 방식에 매우 놀랐다. 예를 들어 목수로 일했던 학생이 디자인한 활자체는 한국의 고전적인 목판 활자의 인상과 비슷했다. 학생들이 각자의 배경에 따라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다양하고 새로운 활자체를 디자인하는 모습을 보며, 디자이너 개개인이 가진 경험과 배경지식이 디자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이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가장 독특한 특징과도 연결된다. 대안학교이기 때문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이곳에 모이고, 각자의 고유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을 만들어 간다. 또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디자인의 다양성을 배운다. 나는 이 ‘다양성’이 앞으로의 디자인계에서 매우 중요한 강점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 레터폼 아카이브, 2019
초특태고딕의 활자체 보기집을 디자인한 과정을 소개해 달라.
초특태고딕을 타입 디자이너가 아닌 그래픽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일반적인 활자체 보기집은 단순히 샘플 문장이나 글자 크기, 폰트 사양 등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지만, 콘텐츠를 포함한 ‘읽을 수 있는 책’으로서 기능하는 활자체 보기집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초특태고딕이 읽히기에 적절한 크기를 설정한 뒤, 활자체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초특태고딕으로 직접 조판하고 디자인했다. 이는 매우 과감한 시도였다. 또한 오리지널 원도를 그린 1세대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에 대한 소개와 활자체에 포함된 글리프 목록을 부록으로 덧붙였다. 글자 크기별 샘플을 보여 주는 페이지에도 최정호가 남긴 어록에서 추출한 텍스트를 사용해, 독자가 내용을 자연스럽게 읽으면서 동시에 활자체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는 보기집을 만들고자 했다. 책을 제본할 때에는 매우 굵고 무거운 인상의 초특태고딕과 어울리도록 검은색 양장 제본 방식을 선택했다. 다만 겉표지의 재질은 천이 아니라 약간의 질감이 있는 종이를 사용해 지나치게 고전적으로 보이지 않고 적절히 현대적인 인상을 주도록 했다. 이는 최정호가 그린 고전적인 오리지널 드로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초특태고딕의 디자인 과정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 레터폼 아카이브, 2019
한국에서는 뉴트로 열풍이 불면서 복고적이고 장식적인 느낌의 활자체가 상품 및 간판 등에 유행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나?
한국에서의 뉴트로, 복고 활자체와 레터링은 이미 몇 년 전 유행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 내의 유행은 매우 빠르고 예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의 유행이 특별한 현상이었다고 해서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다. 앞으로 있을 특별한 현상에도 크게 관심 없다. 그냥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나와 누군가는 필요로 할 활자체를 계속 만들고 싶을 뿐이다.
— 지큐 코리아, 2019
활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나?
활자체를 처음 만든 건 2001년 중순에서 2002년 초반이었다. 당시엔 한창 비트맵 웹폰트를 만드는 게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일반인이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활자체를 만들어서 배포하기도 했다. 그때 우연히 활자체 디자인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어서 취미 삼아 웹폰트 한 벌을 만들어 봤다. ‘바른글꼴’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 보면 엄청 부끄럽다. 한마디로 조악하고 허점투성이다. 그땐 활자체 디자인을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그냥 재미있어서 했다. 웹폰트 파일로 변환하는 방법이라든가 이것저것 모르는 것투성이어서 여기저기 전문가분들께 메신저로 노하우를 물어보면서 공부했다.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성취감이 생겼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한글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나? 무엇이 한글을 특별하게 만드나?
한글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명확하게 기록된 세계 유일의 문자 체계다. 세종대왕은 백성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새로운 문자 체계를 설계했다. 또한 점과 선, 원과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한글의 기하학적 구조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라틴 알파벳은 모든 글자가 도미노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일한 기준선 위에 놓인다. 반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네모난 틀 안에 배치되며, 조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흥미로운 균형을 만들어 낸다. 이는 네모난 연못 위에 나뭇잎이 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개인주의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서구 문화에서는 각 글자가 고유한 공간, 즉 메트릭스를 가진다. 반면 한글을 포함한 동아시아 문자 체계는 고정된 네모 너비 안에서 자음과 모음의 형태와 위치가 계속 변화하며 공간에 맞춰진다. 이는 공동체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 온 동아시아 문화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나는 한글만이 유일하게 특별한 문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활자체 디자이너에게 모든 문자는 평등하며,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차이뿐만 아니라 각각의 문자가 태어난 환경도 존중해야 한다.
— 디자인360°, 2020
작업을 보면 단아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전에 작업이 드라이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스로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꽤 건조한가 보다. 왜 그런지 고민을 하다 보니 색을 다채롭게 쓰지 않는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사실대로 말하면 색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것이다. 색을 고르거나 꾸미는 것에도 워낙 소질이 없다. 그냥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다”라는 마음으로 보통 두 톤 정도의 색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 색이나 형태 등 다른 요소가 많아지는 순간 정말 중요한 글자의 힘이 약해진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말 완성도 있는 활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더 멋있고. 그래서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다. 지금 그리는 글자에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뭐 대단한 디자이너라고 벌써 그걸 멋부림으로 숨기고 싶지 않다. 그냥 날것 그대로 드러내야 사람들이 좋은 건 좋다 하고, 이상한 부분은 이상하다고 말해 줄 것이다. 그게 또 일종의 피드백이 되는 셈이다.
— 타이포그래피 서울, 2015
내 활자체로 남기고 싶은 문장이나 단어가 있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내가 만든 활자체들이 세상에 남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활자체들로 어떤 문장을 남길지는 내 활자체를 쓰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라틴 알파벳에서 한글로 잘못 적용된 사례를 본 적이 있을 것 같다. 흔한 실수로는 무엇이 있으며, 그것들은 어떤 인상을 주나?
일반적으로 CJK 문자는 네모난 박스 안에 들어가고 그 공간을 꽉 채우도록 그려지기 때문에, 라틴 알파벳보다 시각적으로 더 크게 보인다. 따라서 CJK 문자와 함께 쓰이는 라틴 알파벳은 크기를 키울 필요가 있다. 보통은 x-height를 높이는 방식으로 조정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자칫하면 원래 라틴 활자체의 디자인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부호 역시 CJK 문자와 함께 조판했을 때 더 잘 읽히도록 크기를 키우거나 위치를 다시 잡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관련된 모든 문자 체계에 맞게 이러한 요소들을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 활자체에 나중에 다른 문자 체계를 추가하는 확장 작업의 경우라면, 이러한 시각적 크기 조정과 위치 조정을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
— 워드스 오브 타입, 2024
작업 스타일은 어떤가? 이야기를 나눌수록 활자체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의 태도, 결이 묻어난다고 느껴진다.
결정을 서두르는 편이 아니다. 조급하면 오히려 흐름이 깨진다. 해결되지 않는 문자가 있어도 억지로 맞추기보다는 잠시 뒤로 미루고 다른 문자를 그리며 자연스럽게 실마리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편이다. 긴 호흡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게 훨씬 많다. 삶에서도 비슷하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기’보다 ‘두 개를 모두 가져갈 방법’이 뭔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작업에서도 양쪽을 살릴 수 있는 조형을 찾으려고 오래 들여다보는 편이다. 그 시간이 쌓여 일관성이 된다고 생각한다.
— 한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 2025
글자에는 의미가 담긴다. 그렇다면 글자의 모양인 활자체는 그 의미에 얼마큼, 어떻게 관여할 수 있을까?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한글을 디자인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한국인은 한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형태보다 먼저 인식된다. 하지만 언어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만드는 활자체가 읽기 위한 활자체인지, 보이기 위한 활자체인지는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글자의 형태가 관여하는 부분이 크건 적건, 중요한 것은 활자체를 읽고 보는 사람이 느끼는 톤 혹은 무드, 딱 그 정도지 않을까.
— 지큐 코리아, 2019
활자체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모든 활자체 디자이너는 각자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활자체 디자인은 ‘예술’의 영역이라기보다 하나의 ‘제품 디자인’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활자체는 사람이 사용하는 일종의 ‘도구’이기 때문에 어느 누가 쓰더라도 손에 잘 맞게, 편리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 좋은 도구를 만드는 것이 이 일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 자신이 잘 드러나는 작업이 있고 잘 보이지 않는 작업이 있는데, 후자 쪽에 더 가깝다. 마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늘 곁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글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흔히 모르고 지나치듯 사용하는 글자들이지만, 그 글자의 아름다움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더 좋은, 아름다운 글자를 보고, 읽고, 쓸 수 있도록 하고 싶다.
— 컨셉진 65호, 2019
디나모, 라인투 등 해외 타입 파운드리와의 협업은 어떤 계기로 시작됐나?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타입페이스 패밀리를 함께 디자인할 때 디자인 방향과 기준을 어떻게 공유하고 조율하나?
2016년 디나모의 요하네스 브레이어와 서울에서 처음 만났고, 서로의 작업을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난다. 이후 2017년 스위스에서 다시 만나 파보리트 한글에 관해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당시 라틴 알파벳 활자체를 다국어로 확장하려는 디나모의 시도와 연구 주제가 잘 맞아떨어지면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다국어 확장 프로젝트 협업에서는 어떤 문자가 중심이 되는지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달라진다. 파보리트 한글의 경우 오리지널 라틴 알파벳 활자체 디자인이 있는 상태에서 한글 세트를 추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리지널 콘셉트나 기획을 해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이미 한 번 완성된 라틴 알파벳 디자인 옆에 어떤 형태의 한글이 서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역시 이때에도 특정 형태를 직접적으로 맞추기보다, 전체적인 인상과 태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파운드리마다 고유한 분위기와 작업 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어떤 파운드리는 유쾌하고 실험적인 태도를 띤다면, 어떤 파운드리는 절제되고 구조적인 접근을 선호한다. 디나모의 친구들은 실제로도 친근하고 유쾌해서 그러한 인상을 활자체에 반영하려고 하기도 했다. 또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언어적 배경에서 오는 차이가 흥미로운데, 한글이 모국어가 아닌 디자이너들의 제안은 때로 낯설거나 이상한 실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많이 발견하는 편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아이디어가 나올 때가 있다. 그런 의견들을 이질적이라고 배제하기보다 오히려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 구현하는 것이 협업자로서의 역할이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기보다는, 한글과 라틴 알파벳, 동양과 서양, 각자의 배경과 태도가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동시에 하나의 인상으로 정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협업이라 생각한다.
— 멀티-스크립투얼, 2026
실험 과정에서도 활자체의 기능성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하나? 실험의 결과로 얻은 혁신을 실제 프로젝트에 더 효과적으로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를 활자체 디자이너 70퍼센트, 그래픽 디자이너 30퍼센트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글자를 그래픽 형태로 실험할 때도 활자체의 기능과 가독성을 항상 고려한다. 다만 이러한 고려가 활자체를 디자인할 때 장애물이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는 개인적인 야망이자 바람이기도 하다. 좋은 활자체를 디자인하는 데 만족하는 것을 넘어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작업도 보여 주고 싶다. 한글은 비교적 역사가 짧기 때문에 한글 활자체에는 아직 형태적 다양성이 부족하다. 한글 형태를 둘러싼 이러한 다양한 시각 실험이 나를 포함한 다른 한글 활자체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실험적 접근은 한글처럼 비교적 젊은 문자가 지닌 창제 정신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디자인360°, 2020
활자체 디자이너로 꾸준히 작업하게 해 주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활자체를 써 주는 사람들이다. 디자이너로 일을 하다 보니 주변에서 내 활자체가 쓰인 많은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본다. 혹은 서점에 가면 이름 모를 누군가 내 활자체로 디자인한 책들을 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정말 행복하다. 내가 애정을 담아 만든 글자를 누군가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새로 디자인하는 것에서 보람을 느낀다. 또 동시에 일종의 피드백도 받는다. 실제로 사용된 예시를 보며 다음에 어떤 글자의 어떤 부분을 다듬을지, 또 어떤 표정의 새로운 활자체가 필요한지 등에 대해 의견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인 모두가 아는 한글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때론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 쓰임 자체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한글 활자체 디자인은 매력적이면서도 명쾌한 디자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 컨셉진 65호, 2019